성경강해

빌레몬서 본문묵상과 탐구(6/9)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은 사람들

편지를 보내는 자와 받는 자들(1-2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맺어지는 관계

바울은 언제나 그랬듯이 편지의 첫머리에서 편지를 보내는 사람과 받는 사람들을 밝히고 있다. 이 사람들의 이름을 각각 기록하고, 그 옆에 바울이 이들을 부르고 있는 호칭들을 기록해 놓고 대조해보면 우리는 이 사람들의 인간관계와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보내는 사람과 받는 사람들의 이름은 바울, 디모데, 빌레몬, 압비아, 아킵보이다. 그리고 이들이 서로를 인식하는 칭호는 이렇다. 바울 –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갇힌 자, 디모데 – 형제(our brother), 빌레몬 – 우리의 동역자(our fellow worker), 압비아 – 자매(our sister), 아킵보 – 우리와 함께 된 군사(our fellow soldier).

이들이 그러한 호칭으로 서로를 인식하는 것이 가능하게 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우리의 형제”라는 디모데는 바울과 그리고 그 밖의 다른 사람들과 서로 남남이다. 한 집안의 형제가 아니다. “우리의 자매”라는 압비아는 빌레몬의 아내로 알려져 있지만, 바울이나 디모데의 누이는 아니다. “우리의 동역자”로 불려지고 있는 빌레몬도 바울과 천막업을 같이하는 동업자는 아니다. “함께 된 군사”로 불리고 있는 아킵보도 빌레몬의 아들일 것이라고 추측은 하지만, 이 편지에 등장하는 다른 사람들과 같은 군부대에 소속된 군인은 아니다. 그런데도 이들은 무엇을 근거로 우리의 형제, 자매, 동역자, 전우 등으로 서로의 관계를 인식할 수 있게 된 것인가? 내가 한 여자를 나의 아내라고 하는 근거는 결혼관계가, 한 아이를 나의 자녀라는 관계로 인식하는 근거는 핏줄이라면, 이들이 서로를 그렇게 인식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그리스도 예수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혹은 각자가 그리스도 예수와 맺고 있는 “그리스도 예수와의 관계”를 근거로 한 것이다. 빌레몬이 바울이나 다른 사람들과 동역자인 것은 그들이 각각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한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아킵보가 “우리의 전우”인 것은 우리가 모두 그리스도를 위하여 싸우는 자라는 사실을 근거로 하여 이루어지는 관계이다. 뒤이어 등장하는 오네시모나, 서신의 끝에서(23-24절, cf. 골로새서4장) 안부를 전하는 에바브라, 마가, 아리스다고, 데마, 누가 등과의 인간관계도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이들이 누리게 된 관계이다. 지연이나 학연이나 혈연을 앞세워서 맺어진 관계를 내세우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관점을 부각시켜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우리 서로서로가 맺고 있는 이러한 관계를 인식하도록 강조하는 것을 메시지로 묵상 할 수 있다. 그리고 실질적인 삶의 현장에서 그러한 관계를 확인하고 누리도록 도전하는 적용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더욱이 극도로 개인주의적이고 이기적인 풍토가 교회 안에도 만연하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공동체성이 심각하게 위협을 당하고 있는 이 시대에는 이러한 메시지를 통한 도전과 촉구가 반드시 필요하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성도들을 향한 축복 선언(3절)

편지를 보내는 자들과 받는 자들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서로 어떠한 관계에 있는지 밝혀지자 사도가 거의 즉각적으로 하는 일이 있다. 이들에 대한 축복을 선언하는 것이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 지어다”(3절). 사실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와 골로새서를 제외한 그의 모든 서신에서 편지를 받는 이들을 그렇게 축복하고 있다. 디모데전서와 후서에서는 은혜와 평강 외에 긍휼을 더하여 축복한다. 바울은 누가 뭐라 해도 성도들을 축복하는 사도인 것이 분명하다. 혹시 그가 축복으로 기원하는 “은혜와 평강”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를 모른다할지라도, 바울의 이러한 축복행위 자체가 이미 우리에게 도전적인 메시지를 함축하고 있다. 이 점을 부각시켜서, “당신이 다른 성도들과 관련하여 주로 하는 일은 무엇인가? 축복인가? 원망과 불평과 비난인가? 아니면 무관심인가?”하는 적용적 질문과 함께 메시지를 전개해나가는 한편의 설교도 가능할 것이다.
바울이 그의 서신 첫머리에서 행하는 성도들을 향한 이러한 축복 행위를 단순히 당시의 서신들의 형식에 따른 의례적인 절차 정도로 언급하고 지나가는 것은 잘못이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지체들을 이렇게 축복하는 바울의 심정과 근거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바울은 편지의 서식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렇게 해야만 하는 당위성을 언제나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당시 편지 서식에 이러한 형식이 없었다 할지라도 그는 자신의 편지를 받는 성도들을 이렇게 축복하였을 것이 틀림없다. 그것은 편지의 격식에서 온 것이 아니라, 성도들을 향한 심장에서 온 것이었다고 해야 한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형제가 되고, 자매가 되고, 동역자, 그리고 전우가 된 성도들을 향하여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근거로 진심으로 복을 빌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오늘날 우리도 본받아야 될 일이 아닌가?

은혜와 평강

은혜는 무엇이고, 평강은 무엇인가? “은혜”는 보통 “받을 자격이 없는 것을 주는 것”이라 한다. 이것은 “죄인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호의”
이며 이것이야말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어지는 모든 실질적 축복의 근원”
이다. 그러므로 이 은혜가 없이는 그리스도인은 한순간도 성도의 복된 삶을 살 수 없다. 그러므로 사도는 에베소에 보내는 편지에서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은혜가 있으라”는 말씀으로 편지를 끝내는 것이 아니겠는가! “평강”은 유대인들의 전통적인 인사인 “샬롬(평안)”을 의미한다. 이것은 죄로 말미암아 생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원수 관계가 화목의 관계로 회복됨으로써 이루어지는 상태를 말한다.
하나님과의 화목과 사람 사이의 화목이 이루어지고, 그 화목이 가져오는 여유로움과 평안함을 누리는 것이 평강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은혜의 결과이기도 하다. 이런 점에서 은혜와 평강은 서로 마치 원인과 결과처럼 붙어있는 것이기도 하다.
은혜와 평강의 근원은 어디인가? 사도는 분명히 밝히고 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도 밝힌 바와 같이 사도는 그의 거의 모든 서신에서 은혜와 평강을 말 할 때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그것이 주어지는 것임을 선언하고 있다. 참된 은혜와 평강은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것임을 강조함으로 평안과 위로를 얻으려고 허탄한 것들을 좇으며 스스로 속고 있는 세태를 도전하는 설교를 이 대목에서 시도해봄직 할 것이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가 은혜와 평강의 근원이 되는 것은 당연하다. 아니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만이 진정한 은혜와 평강의 근원이 되실 수 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다.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는 분이시다. 그런데 그분은 우리의 아버지이시다. 그의 객관적인 능력과 그가 우리와 맺고 있는 관계가 그가 우리에게 은혜의 근거가 되시는 확실한 이유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나사렛 예수로 우리 가운데 오셨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죄의 댓가를 대신 지불하시고 평화를 회복하신 구원자 그리스도이시다. 그런데 그 구원자가 우리의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그가 우리의 평강 곧 샬롬의 근거가 되실 수 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은혜와 평강의 근원은 여기에 있다. 그가 누구이시며, 우리와 무슨 관계이신가 하는 데에 있다.

빌레몬

빌레몬의 인적사항을 파악하는 것이 빌레몬서를 본문으로 한 우리의 설교에 무슨 직접적인 유익이 있을 것인가 하는 점에 있어서는 다소 회의적일 수 있다. 그러나 간접적인 도움자료는 될 수 있을 것이다.

빌레몬은 이 편지의 수신자이다. 비록 여러 사람의 이름이 편지의 첫머리에 언급되고 있지만 이 편지의 실질적인 수신자는 빌레몬이다. 그래서 수신자들의 이름을 나열하는 데서도 맨 처음에 빌레몬의 이름이 언급되고 있다(1절). 그리고 4-23절에 걸쳐서 바울이 거듭거듭 자신의 부탁을 간곡히 요청하고 있는 “너(2인칭 단수)”도 비록 이름은 나타나고 있지 않지만 그가 빌레몬이라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렇다면 이 사람 빌레몬은 누구인가? 빌레몬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직접적으로 진술하는 자료는 거의 없다. 그러나 그와 관련된 몇몇 진술을 근거로 빌레몬에 대한 인적사항들을 추론해 볼 수는 있다.

그는 골로새 사람이었다(골4장). 그는 바울의 전도 사역의 결과로 구원을 받은 사람일 것이다(19절). 바울이 골로새를 방문한 적은 없었던 점을 감안한다면, 빌레몬은 아마도 바울의 에베소 사역 중에 회심을 하였을 것이다. 에베소는 골로새에서 160km 정도 떨어져 있고, 바울은 이곳에서 3년간 복음 전도 사역을 수행하였다. 이 기간 동안 “온 아시아”가 복음을 듣게 되었다(행19:10, 26). 그러므로 빌레몬도 이 때 복음을 듣고 회심하였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뿐만 아니라, 빌레몬은 바울이 에베소에서 사역을 하는 동안 그 사역을 도왔으며 바울이 떠난 후에는 그 사역을 어떤 식으로든지 이어받았을 가능성이 있다. 바울이 빌레몬을 “동역자”라고 부르고 있는 사실이(2절) 이를 입증한다. 바울은 “동역자”라는 이 용어를 자기와 함께 복음 전하는 일을 한 사람에게 한정하여 독특하게 사용하기 때문이다. 빌레몬은 리쿠스 계곡에 있는 교회들의 감독이었다는 주장이 있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아무튼 빌레몬은 골로새에서 부유 계층의 사람이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에게는 종들이 있었으며, 오네시모도 그 종들 중 하나였던 것이다(11-12, 15절 골4:9). 또한 그의 집이 그 지역의 그리스도인들이 회합을 갖는 교회가 모이는 장소로 사용된 것을 보아도(2절) 그는 부유한 사람이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에게는 가정이 있었다. 편지의 서두에서 바울이 언급하는 압비아는 빌레몬의 아내이고, 아킵보는 그의 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아킵보도 복음 사역을 맡아 수행한 것을 보면(2절, 골4:17) 빌레몬은 그의 가정을 건실한 신앙인의 가정으로 잘 꾸려간 것으로 보인다. 바울은 이 편지에서 빌레몬의 구체적인 신앙 행위를 열거하는데 이것은 다음 장에서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면서 별도로 다룰 것이다.

큰 기쁨과 많은 위로를 주는 소문의 주인공(4-7절)

여러 사람들을 향한 인사를 마치자 바울은 곧바로 빌레몬을 상대로 개인적인 이야기를 시작한다. 바울은 빌레몬을 어떻게 여기고 있는가? 그는 자기가 들은 빌레몬에 대한 소문을 근거로, 본론으로 들어가는 첫마디에 이렇게 말한다. “나는 기도할 때마다 너를 기억하고, 언제나 나의 하나님께 감사 한다”(4절). 빌레몬은 바울에게 있어서 하나님을 향한 간구와 감사의 제목이 되는 사람이다. 기도할 때마다 생각이 나는 사람, 그리고 생각이 날 때마다 항상 하나님께 감사가 되는 사람. 기도할 때마다 그를 위하여 하나님께 간구하고 싶어지고, 그가 생각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가 터져 나오는 신자! 이 단락(4-7절)의 말을 마치고 다음 용건으로 넘어가려 하면서 사도는 빌레몬에게 또 다시 한마디를 덧붙인다. “형제여, 나는 너의 사랑으로 큰 기쁨(great joy)과 많은 위로(much encouragement)를 얻었노라”(7절). 그는 사도에게 큰 기쁨과 많은 위로의 근거가 되는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바울은 무엇 때문에 기도할 때마다 빌레몬이 생각나고, 그가 생각날 때마다 항상 하나님께 감사가 되는 것인가? 왜 바울은 빌레몬의 소문을 들으며 큰 기쁨과 많은 위로를 얻게 되는 것인가? 우리도 다른 성도에 대하여 바울과 같이 그렇게 하는가? 우리에게도 빌레몬과 같은 그런 사람이 있는가? 기도할 때마다 생각이 나고, 생각이 날 때마다 감사가 되는 그런 사람. 그 사람에 대한 소식을 듣는 것이 큰 기쁨과 많은 위로가 되는 그런 사람 말이다. 빌레몬의 무엇이 바울을 그렇게 만드는 것인가? 우리도 누구에겐가 빌레몬처럼 그런 사람이 되어주고 있는가? 이제 이러한 관점에서 본문을 살펴보기로 하자.

* 정창균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총장, 설교자하우스 대표)

정창균
Latest posts by 정창균 (see all)

그래도 의인은 제 길을 간다

세상이 이런데 언제까지 이러실 거냐고 따져 묻는 하박국에게 결국 하나님은 이렇게 되물으신 셈이었다. 세상이 이런데 너는 어떤 길을 갈 거냐고. 악인들로 세상이 뒤집어지고 있을 때 너는 어떤 길을 갈 거냐고. 그리고 하나님이 스스로 주신 답은 그것이었다. “의인은 그래도 제 길을 간다!” 세상이 어떻게 뒤집어져도, 신자는 여전히 제 길을 간다!

빌레몬서 본문묵상과 탐구(9/9)

바울이 받아들이고 있는 오네시모와 실제 그가 처하여 있는 법률적 사회적 상황에서 오네시모 사이에는 극심한 모순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는 범죄하고 도주한 노예이지, 영원히 함께 할 사랑하는 형제는 아니다. 이것은 어떤 점에서 바울의 오네시모와 빌레몬의 오네시모 사이의 차이이기도 할 것이다. 그런데도 바울은 오네시모를 그가 처해있는 사회적 상황과는 전혀 다른 입장에서 받아들이는 근거가 무엇인가?

빌레몬서 본문묵상과 탐구(8/9)

8절에 이르면서 사도는 본격적으로 빌레몬을 향한 용건을 밝히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것은 이 편지의 남은 부분 거의 전부를 차지하고 있다. 8절을 “그러므로”로 시작하는 것으로 보아 앞에서 빌레몬에 대한 소문을 근거로 그를 칭찬했던 것도 사실은 이 용건을 효과적으로 성취하기 위한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한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것은 오네시모를 위한 부탁이었다.

빌레몬서 본문묵상과 탐구(7/9)

오네시모를 통해서도 빌레몬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가능성도 있다. 빌레몬에 대한 소문을 들은 사도는 그에게 편지를 쓰는 용건을 본격적으로 다루기 시작하는 첫 마디에 감격에 차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기도할 때마다 너를 기억하고, 언제나 나의 하나님께 감사한다!”(4절). 사도에게 있어서 빌레몬은 기도할 때마다 그를 위하여 하나님께 간구하고 싶어지고, 그가 생각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가 터져 나오는 신자라는 것이다.

© Copyright - snthouse 성도와 신학 아카데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