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를 위한 신학

종말 신앙

전주새중앙교회/평신도를 위한 신학강좌

정 창 균(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총장)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고전 15:58).

오늘 저는 종말 신앙이라는 주제로 여러분에게 잠깐 말씀드리려 합니다. 종말 신앙이란 종말론적 믿음으로 이 땅에서 하루하루의 삶을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종말 신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종말에 대한 분명한 이해로 부터 시작하여, 종말 신앙의 구체적인 내용, 종말 신앙으로 하루하루를 산다는 것의 구체적인 의미, 그리고 종말 신앙으로 살아가기 위한 구체적인 방편 등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합니다. 따라서 저는 종말 신앙이라는 주제를 다음과 같은 네 가지 관점에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 종말이란 무엇인가?

둘째, 종말 신앙의 내용은 무엇인가?

셋째, 종말 신앙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넷째, 종말 신앙으로 살기위한 구체적인 방편은 무엇인가?

  1. 종말이란 무엇인가?

성경적인 관점에서 종말이란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역사에서 말하는 종말과는 매우 다릅니다. 종말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는 그 글자 의미대로 ‘역사의 끝이다’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역사의 끝이라는 의미에서만 종말을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즉, 역사의 끝이 다인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또한 모든 것이 끝나 종결되었다, 끝장나버렸다는 의미에서 역사의 종결을 의미하지도 않습니다. 역사는 종결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역사를 진행하시고, 역사의 주인으로서 살아계신 한 역사는 계속됩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직선적으로 계속 됩니다. 뱅뱅 도는 원이 아니고, 어느 한 시점에서 끝나버려서 그 뒤는 아무 것도 없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역사는 하나님이 이끌어 가시는 직선적인 역사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존재가 끝날 때까지 계속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존재에 있어서 끝이 없으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기독교에서 말하는 종말이란 일반적으로 말하는 종결이라는 의미의 종말과는 다른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말하는 종말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하나님의 계획이 최후적으로 완성된다는 의미에서 종말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이 정하신 목적이 있는데, 그 하나님의 목적이 완전하게 성취된다는 점에서 종말이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종말이 역사가 끝장나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즉 하나님의 계획이 마침내 절정에 이르러서 최후적으로 완성된다, 완성되는 때가 있다, 하나님의 정하신 목적이 어떤 장애에도, 방해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완전하게 성취된다, 그 성취를 놓고 그 때를 종말이라고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역사는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의 완전하고 최후적인 완성과 성취를 향하여 진행한다.

이것이 종말에 대한 기독교적 이해입니다. 기독교의 종말에 대한 개념입니다. 다시 정리하자면 이렇습니다. 역사는 언젠가 끝에 도달하여 없어지고 종결되어 끝장나는 것이 아닙니다. 역사는 하나님께서 이 역사 안에서 펼쳐 가시는 그 계획과 의도하시는 목적이 최후적으로 완전하게 성취되는 그곳을 향하여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 성취의 시점이 종말일 뿐 아니라, 그 시점을 향하여 진행하는 이 역사의 과정이 또한 종말의 시대입니다.

그렇게 이해할 때 ‘현재’가 무엇인지 분명해집니다. 우리는 지금 하나님의 목적이 최후적으로 완전하게 완성되는 곳을 향하여 진행하고 있는 역사 위에 서 있습니다. 이를 역사에 대한 종말론적 이해라 말합니다. 그러니까 현재는 종말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이 저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종말은 현재와 단절되어 어디엔가 있다가 어느 순간에 갑자기 닥쳐오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지금이 하나님의 완성과 성취를 향하여 계속 진행해가고 있는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현재에 대하여 잘못 생각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이나 밖을 막론하고 특별히 실용주의 사상에 너무 지독하게 찌들어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이 현재라고 하는 것은 자연히 그 자체로서는 아무런 의미도 없게 됩니다. 열심히 살아서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가 관건입니다. 열심히 해서 나중에 뭐가 되는지가 최대의 관심사입니다. ‘열심히 봉사해서 얻는 것이 무엇인가? 이렇게 해서 어떤 효과가 생기는가? 어떤 결과를 얻을 수 있는가?’에 의해서만 현재라고 하는 것은 가치를 부여받게 됩니다. 죽어라 기도했지만 아무 응답도 없으면 헛것이었다고 한탄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현재라고 하는 것은 언제나 어떤 효과를 만들어내는가, 어떤 결과를 만들어 내는가를 결론짓는 수단으로서만 존재하는 것입니다. 현재 자체로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현재는 언제나 불안하고 초조합니다. ‘이렇게 해서 결과가 잘 될까? 이렇게 해서 손해 보는 것은 아닐까? 헛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현재 자체의 가치는 없습니다. 실용주의 사회에서는 나중에 어떤 효과가 나타나는가에 의해서만 비로소 현재의 의미와 가치가 결정될 뿐입니다.

다윗은 자기가 성전을 지으려고 다 준비했습니다. 심지어 다윗은 지을 성전의 내부 인테리어 설계까지도 자신이 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성전은 못 지었습니다. 그 아들이 지었습니다. 그러면 다윗이 성전 건축할 자재를 준비하느라, 성전 내부 인테리어를 설계하느라 죽도록 고생했던 그의 하루하루는 헛것일까요? 다윗이 성전 건축을 위해 준비한 현재는 아무 의미 없는 것일까요? 죽도록 고생만 하고, 정작 성전을 지은 영광은 다른 사람이 가져갔습니다. 그러면 다윗의 현재들은 다 헛수고이고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이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은 선교사로 파송을 받아서 1차 선교지 루스드라에서 처음으로 본격적인 설교를 합니다. 그 처음 설교를 하면서 마지막에 다윗의 이야기를 합니다. 아마 바울은 다윗의 삶에서 매우 깊은 인상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저도 바울이 다윗을 평가한 그 말씀을 들은 이후로 ‘그렇게 살아야지’라고 결심한 적이 있습니다. 바울은 사도행전 13장에서 “다윗은 당시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섬기다가 잠들어 그 조상들과 함께 묻혀 썩음을 당하였으되”라고 말했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이루지도 못할 일을 위해 자기에게 주어진 시간을 허비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다윗이 자기 당대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섬긴 인생을 산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다윗이 성전을 지었는지, 솔로몬이 지었는지는 하나님의 관심이 아닙니다. 다윗이 자신의 현재를 어떻게 살았는지가 중요한 것입니다. 솔로몬이 자신의 현재를 어떻게 살았는지가 중요한 것입니다. 다윗이 자신의 당대에 성전을 짓지 못했기 때문에 그는 헛수고 한 것이 아닙니다. 다윗에게는 다윗의 삶 그 자체가 하나님이 주신 은혜요 복인 것입니다. 성경은 그 자체로 가치가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우리가 사는 현재를 실용주의적 가치에 사로잡혀서 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예배에 갔더니 “오늘은 예배에 은혜도 안 되고, 잠만 오고, 설교도 이해가 안 되는데 괜히 왔다. 다음에는 차라리 그냥 집에 있는 게 나아. 예배 시간에 졸고, 다른 사람 피해주느니 가지 말자. 기름 값만 버렸으니까 차라리 집에 있는 것이 나아. 교회 가서 꼴 보기도 싫은 집사 때문에 괜히 미워하고 죄만 짓느니, 차라리 집에 있는 것이 죄라도 덜 짓고 더 좋아!” 이것이 다 현재를 어떤 효과가 있는가, 어떤 유익이 있는가에 의해서 평가하는 것입니다. 유익이 있으면 현재는 가치가 있는 것이고, 없으면 현재는 가치가 없다는 것입니다. 현재는 단지 장차 무엇인가 효과를 거두기 위한 수단으로서만 존재할 뿐, 현재 그 자체로서는 독립된 의미도 가치도 갖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리 예배에 와서 졸다가 가고, 설교에 은혜도 안 되고, 죄만 짓다 갔어도, 예배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너는 내 앞에 나와서 예배드릴 수 있는 사람이야!”라고 뽑은 사람만 예배의 현장에 올 수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아무리 예배 시간에 졸다가 왔어도, 설교가 귀에 안 들어오고 은혜도 안 되었어도, “나는 예배자로서 하나님께 뽑힌바 되어 예배 공동체의 자리에 있다”는 의식을 잃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특권입니까! “하나님께서 주신 나의 현재는 복이고 가치가 있는 것이야!” 그렇잖습니까? 우리가 너무 오랫동안 이런 의식 없이 살아서 자꾸 이런 말을 들어야 합니다. ‘오늘 이렇게 하면 뭐가 생겨? 이렇게 해서 잘 돼?’ 이렇게 오늘을 어떤 수단으로만 보고 하루하루 초조와 불안에 얽매어서 살지 마십시오. 거기서 벗어나서 ‘오늘 나의 현재는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므로, 현재 자체로 매우 귀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이런 생각으로 사시길 바랍니다. 대단히 창피한 이야기지만, 저는 이것 하나를 깨닫는데 60년 가까운 세월이 걸렸습니다. 이제야 그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내게 주신 현재를 감사하고 살며, 이 자체가 보상이란 생각을 가지고 살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종말이란 무엇인가? 지금 현재와는 아무 관계없이, 상관없이 저 멀리 어딘가에서 어느 순간 척하고 닥쳐오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지금 내 현재 삶이 그 역사의 장을 향하여 진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하루는 하나님의 완전한 성취, 곧 최후의 완성이 이뤄지는 그 곳을 향하여 가고 있는 발걸음입니다. 그래서 신자가 사는 현재는, 이 사실을 모르고 그리스도 밖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현재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현재를 보는 눈을 바꾸어야 합니다. 그래서 제가 종말의 정의를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정의를 한 것입니다.

종말은 어느 순간의 시점이 아니라, 최후적 완성과 성취를 향하여 진행하는 기간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말세란 지금까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예수님이 다시 오셔서 이 구원의 역사를 완전히 완성하시고, 우리를 부활시키시고, 최후 심판을 하셔서 완전한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시는 그때를 향하여 가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을 말세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말세는 예수님이 오신 때부터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1. 종말 신앙의 내용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종말론적 믿음으로 이 땅에서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을 종말 신앙이라고 합니다. 즉, 종말론적 믿음과 그 믿음에 근거한 현재적인 삶을 종말 신앙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종말 신앙은 두 가지를 중요한 내용으로 갖게 됩니다. 첫째는 종말론적 믿음이고, 둘째는 종말론적 믿음에 근거해서 살아가는 오늘 하루하루의 현재적 삶입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종말론적 믿음을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기서는 종말 신앙이란 무엇인가 하는 주제로 우선 종말론적 믿음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지 세 가지로 요약하여 살펴보겠습니다. 그런 다음 종말 신앙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주제를 다음 장에서 계속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종말론적 믿음

하나님의 완전한 성취를 믿는 것

종말론적 믿음이란 하나님의 최후적 완성에 대한 믿음입니다. 풀어서 말하면 앞에서 저적한 대로 그 종말이 확실히 있다는 것을 믿는 믿음입니다. 그리고 그 종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으로 말미암아 현실적으로 실현된다는 믿음입니다. 즉 종말론적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믿음을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종말론적 믿음은 그 내용을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목적하신 것을 마침내 완전하게 성취하시고 최후적으로 완성하신다는 믿음을 갖는 것입니다. 조금 전에, 하나님께서 성취하시는 것이 종말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나는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이 종말론적 믿음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하나님의 최후적 완성이란 것이 무엇일까요? 여러 가지로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된다고 할 수 있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 역사의 완성이라고 할 수도 있고, 하나님의 공의의 최후적인 완성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에서는 하나님의 공의가 잘 이해되지도 않고, 또 실감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공의의 문제에 대하여 고민하다가 하나님께 대들었던 사람들이 성경에도 많이 있습니다. 하박국은 하나님께 대놓고 대들었고, 구약의 욥에게도 사실은 그것이 문제였습니다. 아브라함도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한다고 하실 때, 의인이 악인과 함께 심판받는 사태가 벌어질 수 있다는 점을 갖고 하나님의 공의를 내세우며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문제를 제기한 것은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의문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최후적 완성이란 그 누구도 하나님의 공의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하거나 반대할 수 없도록 완전하게 성취될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그것이 최후적으로 완성될 것입니다.

그것은 관점을 바꾸어 이렇게도 표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최후적으로 성취되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말합니다. “나는 예수를 수십 년 믿었어도 모르겠어. 혹시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은 사실일는지 모르겠지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은 확실히 사실이 아닌 것 같아.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지 않으시는 것이 확실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잘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다시 오시면, 하나님께서 사랑이시라는 것을 누구도 시비 걸 수 없고, 의심할 수 없도록 완전하게 사랑이 완성된다 그 말입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그렇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종말론적 신앙의 중요한 첫 번째 내용입니다.

이 종말론적 믿음은 현실을 사는 우리에게 큰 능력이 됩니다. 때로는 공의가 무너지고 우리가 사랑받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는 상황 속에서 “하나님이여!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내게서 얼굴을 돌리십니까? 하나님이여! 일어나소서. 깨소서. 어찌하여 주무십니까?”라고 한탄하며 현실을 비관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런 현실을 겪을 때에도 하나님의 사랑은 완성을 향하여 간다는 믿음을 갖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이 우리에게 인내와 용기를 주는 것입니다. 욥의 경우를 보십시오.

그런데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그가 왼쪽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쪽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욥 23:8-9).

지금 나의 현실의 삶 속에서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은커녕 하나님이라는 존재가 있다는 것조차도 확인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 수 있는 어떤 증거나 징조도 자기의 현실에서는 확인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 곳에서도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확인할 수 없는 절망적이고 비관적인 현실에 처해 있는 것입니다. 처참한 환경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상황이 자기의 현실임을 인식하면서도 바로 이어서 이렇게 선언합니다.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욥 23:10).

“그러나!” “그가 아신다!” “그가 마침내 순금 같이 만드신다!”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는 절망 가운데서 그러나 하나님이 나의 가는 길을 아신다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너무나 참담한 현실이어서 이 인생의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인지 아무런 기대도 할 수 없지만, 그러나 한 가지 분명히 아는 것이 있다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결국 잘된다는 것입니다. 정금이 된다는 것입니다. 결국은 하나님께서 잘되게 하시고야 만다는 것을 분명히 안다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종말론적 신앙이 그런 것입니다. 억울하고 괴로운 현재도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완전한 성취를 향하여 진행해 가고 있다는 이 종말론적 믿음이 우리에게 능력이 됩니다.

하나님의 현재적 통치를 믿는 것

둘째는 하나님의 현재적 통치에 대한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영원히 통치하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그때부터 드디어 하나님의 통치가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종말을 향하여 진행해가고 있는 현재에도 하나님께서는 통치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여러분, 요한계시록을 보면 매우 중요한 주제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현재적 통치!

그러니까 도무지 하나님의 손길을 발견할 수 없고, 악한 자들이 역사의 주도권을 갖고 역사를 좌지우지하고 있는 현실 속에서도, ‘하나님은 지금도 통치하고 계신다’는 종말론적 믿음이 흔들려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현실 속에서도 여전히 역사를 이끄시고 통치하시며, 그러므로 역사는 여전히 하나님의 완전한 성취와 최후적인 완성을 향하여 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현재적 통치를 믿는 것이 종말론적 믿음입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처럼 두려워하거나 무서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세상이 망해가고 있고, 눈에 보이는 교회가 쇠퇴하고 도전을 받고 무시 받고 있으면 물론 답답하고 화가 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지금도 통치하시고 역사하시며, 종말을 향하여 역사를 진행하시고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우리는 여전히 그리스도인의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마치 자기 최면을 거는 것처럼 “괜찮아, 괜찮아”라고 계속 자기를 부추겨서 평안을 누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은 지금도 통치하시며 종말을 향하여 역사를 이끌고 계신다는 종말론적 믿음을 분명히 가지면, 우리는 어느 곳에서도 신자로서 당당하게 현재를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 신자들은 특별한 종류의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이 이해할 수도 없고 감당할 수도 없는 존재들입니다.

성도의 최후 승리를 믿는 것

셋째는 하나님의 백성 곧 성도의 최후 승리에 대한 믿음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종말이 마치 용, 여자, 사탄, 마귀라고도 하는 자, 아마겟돈 전쟁, 이마에 인 받은 자, 666 맞은 자들이 역사의 주인공인 것처럼 그것들에게 초점을 맞추어 말하곤 합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이 처음부터 끝까지 주인공으로 삼고 계속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 곧 성도입니다. 그리고 초지일관 드러내는 핵심 주제는 성도 곧 하나님의 백성의 최후 승리입니다.

아무리 붉은 용이 나오고, 바다에서 별것이 나와서 세상을 지배할 것처럼 보여도, 아무리 악한 자들에 의한 무서운 재앙이 쏟아져도 그 위에서 전체를 통치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요한계시록은 일관되게 강조합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통치 아래 이 모든 것들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통치는 이 가운데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지키고 보존하고, 그의 백성들이 최후 승리를 얻는 방향으로 역사를 이끌어 가신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의 서신 이곳저곳에서 밝혔듯이 우리가 현실의 삶 가운데서는 보잘 것 없고, 죽는 자 같고, 굶는 자 같고, 아무것도 없는 빈털터리 같고, 세상의 구경거리와 같고,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양 같은 현실일지라도, 결국은 우리가 최후 승리자가 된다는 것을 믿는 믿음이 바로 종말론적 믿음입니다. 이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종말을 사는 신자가 갖는 확신이고 살아가는 원리입니다.

성도의 최후 승리에는 물론 죽음에 대한 최후 승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죽음에 대한 최후 승리를 믿는 것이 종말론적인 믿음의 중요한 내용입니다. 하나님의 완전한 성취가 있고, 그것이 구체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예수님의 재림입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면 일어나는 일이 있는데, 그것은 부활입니다. 신자의 부활과 불신자의 부활입니다. 신자는 영원히 살고, 불신자는 영원히 죽을까요? 사람은 모두다 영원히 삽니다. 어떤 사람은 천국에서, 어떤 사람은 지옥에서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영원히 사는 것을 가리켜 영생이라 한다면, 인간은 모두 다 영생합니다. 그러나 지옥에서 사는 사람을 죽음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 존재가 없어졌다는 의미에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다는 의미에서 죽음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 사는 것이 죽음입니다.

그런데 신자의 부활은 불신자의 부활과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 있습니다. 신자의 부활은 첫째로 죽음에 대한 승리이고, 둘째로 죄에 대한 승리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의 최후적인 완성입니다. 그러나 불신자는 죽음에 대한 승리를 통하여 일어나지만 죄에 대한 승리는 할 수 없습니다. 죄에 대한 승리는 이 땅에 사는 동안 의지적으로 예수를 나의 구주로 고백하고, 예수께서 내 죄의 문제를 해결했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예수님이 대속의 죽음으로 죄를 해결해서 죄가 없어진 사람이 될 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가 부활할 때 “너는 용서받은 사람이야”하고 최종적으로 죄의 권세를 이긴 자로 확정되는데, 불신자는 그런 적이 없기 때문에 죄인으로 부활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자에게는 종말의 완성과 성취가 실현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예수님의 재림입니다. 그리고 모든 인류의 부활과 함께 심판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시면 완전한 하나님의 공의, 영원한 심판, 누가 영원히 의로운 자고 불의한 자인가 최종적으로 완전하게 결정이 나는 것입니다. 심판이 이뤄집니다.

요한계시록 맨 마지막 구절에서 주님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종말입니다. 그 선언에 대한 반응이 이것입니다. “마라나타!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우리는 그렇게 종말을 기다리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왜 우리가 종말을 기다립니까? 그것은 신자의 최후 승리가 완전히 확정되는 때이고, 하나님의 공의와 하나님의 구원과 계획과 목적이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완전히 성취되고 완성되는 때이기 때문입니다.

  1. 종말 신앙으로 산다는 것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종말 신앙의 내용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종말론적 믿음이고, 둘째는 종말론적 믿음에 근거하여 하루하루 현재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앞의 것이 고백적 종말 신앙이라면, 뒤의 것은 실천적 종말 신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종말론적 믿음이란 종말에 대한 세 가지를 믿는 것이라고 앞에서 확인했습니다. 그러나 이 내용을 염불처럼 외우고 있는 것을 종말 신앙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이 내용을 인격적으로 인정하고 믿고 붙잡을 뿐 아니라, 그 신앙을 갖고 있는 사람으로서 현재를 사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종말 신앙으로 산다고 합니다. 쉽게 말하면 하루하루의 삶을 종말론적인 믿음을 가진 사람으로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교회 와서 예배드리는 것, 직장 생활, 부부 생활, 가정생활, 자녀 양육 등 모든 일상 속에서 종말론적인 믿음을 가진 사람으로서 사는 것입니다. 신앙과 생활은 별개의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교회 안에 있을 때의 문제이고, 생활은 교회 밖에서 일어나는 별도의 일이 아닌 것입니다.

종말론적 믿음에 근거한 현실 이해와 생활

종말 신앙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우리가 살면서 직면하는 현실을 종말론적 믿음에 근거하여 해석하고 이해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4장에서 이 모습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아니하노니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이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심판하실 이는 주시니라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 그가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고전 4:3-5).

사도 바울은 자기가 처한 현실과 그에 대한 자신의 입장에 대하여 지금 중요한 두 가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뭐라고 판단하든지 그것에 휘둘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3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이 말씀은 고린도 사람들이 사도 바울에게 자꾸 시비를 걸었던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에서 사역을 하고 갔습니다. 그 후에 아볼로가 왔습니다. 이제 아볼로의 설교를 듣습니다. 그런데 아볼로의 설교를 듣다 보니, 사도 바울의 설교는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사도도 아닌 것 같고, 그의 설교는 별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의 설교가 형편없다는 둥, 그는 사도도 아니라는 둥 이런 저런 부정적인 말들을 쏟아놓기 시작합니다. 그 말들이 사도에게 자꾸 들려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자기가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사도되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것에 대해 사도 바울이 하는 말입니다.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그런 판단에 얽매이지도, 휘둘리지도 않고 자기의 길을 간다는 말입니다.

둘째는 자기 자신의 양심에 의해서도 좌지우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3-4절에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않는다.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그것으로 내가 의롭다함을 얻지 못한다”라고 말합니다.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않는다.” 이 말은 자기의 양심에 거리낌이 없고 양심에 비춰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 때문에 얼마든지 그것을 내세워서 자기의 주장을 할 수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사실 양심의 기준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을 파멸에 몰아넣고도 “나만 그래? 요즘 사람들 다 그래. 요즘 그렇게 하지 않고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하며 오히려 떳떳해 하고 또 자신의 악행을 정당화합니다. 그런가 하면 다른 사람에게 말 한마디 퉁명스럽게 툭 던진 것 때문에 여러 날 새벽 예배에 나와 통곡하고 회개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마다 양심이 다 똑같지 않습니다. 이런 점에서 양심이란 것은 무서운 것입니다. 자기 양심에 거리낌이 없다는 것을 내세워서 큰 소리를 치면 안 됩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자기 양심에 떳떳하다고 하여 그것을 근거로 자기의 주장을 펴지는 않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자기 양심에 떳떳하다는 사실이 자기가 옳고 의롭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결정적인 근거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이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나를 이리저리 판단하고 깔아뭉개는 사람들의 말에 휘둘리지 않고, 나의 양심에 떳떳하다는 것을 내세워 큰 소리 치지 않고, 나의 길, 내가 가야할 길을 묵묵히 간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하는 것입니까? 어떻게 억울한 일을 당하고 있고 내 양심에 거리낌도 없는데 그것들을 다 무시하고 그냥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자기가 가야할 사도의 길을 갈 수 있는 것입니까? 사도는 이렇게 그 이유를 대고 있습니다. “다만 나를 심판하실 이는 주시니라.”

그러므로 결론처럼 5절에 그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 그가 어둠에 감추어진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우리가 말하고 있는 맥락에서 보면, 정확하게 종말론적 믿음이지 않습니까? 그 종말론적 믿음의 관점에서 자기가 처해있는 현실을 해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휘둘리지 않고 참고 견디면서 여전히 가야할 신자의 길을 갑니다. 왜요?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꿀리는 게 있어서가 아닙니다. 주께서 오시니까요! 주께서 오시면 감춰진 것을 드러내고, 숨긴 것을 나타내신다는 것을 믿으니까요. 다시 말하면 완전한 성취와 최후적인 완성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아니까 괜찮아.” 주님이 오시면 완벽하게 알아주시고, 실상을 드러내시고, 상을 주시는 것을 알고 있기에, 그런 사람으로서 자기의 현실을 해석하고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종말론적 믿음에 근거한 현재의 삶인 것입니다. 이것이 또한 종말 신앙으로 현실을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종말론적 믿음에 입각하여 평생의 하루하루를 살았다는 것은 그가 자신의 죽음이 눈앞에 닥쳤을 때 취하는 행동에서도 분명히 드러납니다. 자기가 이 세상을 떠날 시간이 임박하였다는 사실을 감지하고 사도 바울은 자기가 이 땅에서 살아온 날들을 돌아보며 이렇게 말합니다.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딤후 4:6-8).

그는 예수님이 재림하신 것은 아니지만, 자기 자신의 이 땅에서의 종말을 앞두고 있습니다. 개인적인 종말입니다. 그러자 사도는 자기가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길을 되돌아봅니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삶을 세 가지로 요약합니다. 첫째, 나는 선한 싸움을 싸웠다. 둘째, 나의 달려갈 길을 마쳤다. 셋째, 나는 믿음을 지켰다.

사도 바울이 이 땅에서의 삶을 그렇게 살도록 그를 붙들어 준 것이 무엇입니까? “그 날에 의로우신 재판장인 주님께서 의의 면류관을 내게 상으로 주신다”는 믿음입니다. 자기는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며 사는 사람이라는 의식이 그 하루하루의 고달팠던 삶을 그렇게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달려가고, 믿음을 지키는 삶으로 살아오도록 자신을 붙들었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면서 여전히 자기 뒤에 살아남아 있어서 현재적인 삶을 살아야 하는 사람들에 대한 관심을 갖고 확신에 찬 한마디를 덧붙입니다. “나만이 아니라, (나처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며 사는 모든 사람에게도 그 날에 의로운 재판장으로 오실 주님이 의의 면류관을 주신다!” 종말론적인 믿음에서 나오는 현실 의식을 갖고, 그 의식에 따라 현재의 삶을 다스리며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종말 신앙으로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이와 같이 종말론적 믿음을 근거로 우리의 현실을 바라보고 이해하게 되면, 그것에 따라 그렇다면 오늘을 어떻게 살 것인가를 결정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가게 됩니다. 하루하루의 삶을 종말론적 믿음의 실현을 바라보며 그에 걸맞게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그리스도가 재림하시면 일어날 신자의 부활을 주제로 긴 이야기를 하면서 마지막 결론에 이것을 분명히 단언합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고전 15:58).

이것은 부활 신앙의 현실적 결론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오심으로 실현될 종말의 순간에 이루어질 부활의 확실성과 그 부활의 내용이 무엇인가를 자세히 설명한 후에 내리는 마지막 결론이 그것입니다. 말하자면 앞에서 길게 말했듯이, 우리 신자들은 죽음을 이기고 부활 할 사람들이요, 미래의 부활이 보장된 사람들이기 때문에 이제 현실의 삶을 어떻게 살아야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분명해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1-57절까지에서 행한 긴긴 부활에 대한 말씀을 58절의 한마디로 결론을 지으면서 마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미래의 부활에 대한 긴 말씀을 마치면서 사도는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의 현실로 돌아온 것입니다. 그리고 미래의 확실한 부활을 근거로 오늘 살아야할 삶을 권면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이제 부활을 소유한 자로서, 틀림없이 그리스도 안에서 영광스런 승리의 부활을 할 자로서 우리의 하루하루의 삶을 살아야 된다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은 두 가지를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부활에 대하여 거짓되게 가르치는 가르침이나, 세상의 철학이나, 속된 풍조에 끌려서 흔들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부활을 믿고 고백하는 믿음을 견고하게 가지라는 것입니다. 부활에 대한 고백과 믿음에 흔들림이 없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고백적 부활 신앙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말하고 있는 종말 신앙이라는 말로 바꾸어 말하자면, 종말론적 믿음을 견고히 가지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로 일상의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부활 신앙은 단순히 부활에 대한 교리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성도로서의 삶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부활을 소유하지 않은 사람들, 그리스도 안에서의 부활을 부인하는 사람들은, 인생은 어차피 한번 죽는 것이고 한번 죽으면 그만이니 먹고 마시자 하며 살 것입니다. 그러나 “항상 주의 일에 힘쓰는 자!” 이것이 부활을 믿고 바라보며 사는 신자의 이 땅에서 살아가는 평생의 모습이어야 한다고 사도는 강조합니다.

사도 바울 자신도 이미,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부활)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32절)라고 자기의 삶을 공포한 바 있습니다. 우리가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것은, 우리가 반드시 부활하여 주님 앞에 서리라 믿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하는 주를 위한 우리의 수고가 부활의 날 주님 앞에서 결코 헛수고로 돌아가지 않을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실천적 부활 신앙입니다. 고백적 부활 신앙과 실천적 부활 신앙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부활을 확실히 믿는 신자에게는 그가 가진 부활 신앙의 당연한 결론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부활에 대하여 견실하며 흔들리지 않는” 고백과 “항상 부활하신 주의 일에 힘쓰는 자”로 사는 것을 보고서야 사람들은, 세상은, 그리고 주님은 우리가 정말 부활을 믿고 사는 사람들이란 것을 알아차리게 될 것입니다. 결국 종말 신앙이란 종말론적 믿음에 흔들림이 없고, 그 믿음에 근거하여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10:35 이하에서 말세를 사는 신자들이 살아야 할 삶을 이야기 하면서 믿음의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35절), 인내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라(36절)고 권면합니다. 그러면서 덧붙이기를 “잠시 잠간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37절)고 합니다. 여기서도 담대함을 버리지 않고 살아가는 것, 인내하며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생활을 이어가는 것이 잠시 잠깐 후면 주님이 오신다는 종말론적 믿음을 현실에서 구체적으로 실천해야 할 것으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주님이 잠시 잠간 후에, 그리고 반드시 오시고야 만다는 믿음이 주님을 만날 준비로서 이 땅에서 하루하루 신자로서의 삶을 살게 하는 원동력이 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종말 신앙으로 일상의 삶을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다음과 같은 사도 베드로의 말씀도 역시 같은 맥락의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다 주실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전에 알지 못할 때에 따르던 너희 사욕을 본받지 말고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벧전 1:13-15).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은혜를 주실 것을 믿고 그것을 온전히 소망하라는 말에는 이미 종말론적 믿음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사도는 그렇게 종말 신앙을 말하면서, 그것은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해야만 가능한 일이라고 암시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것을 믿고 그가 오실 때 주실 은혜를 바라본다는 것이 담고 있는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내용을 두 가지 방식으로 제시합니다. 하나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갖기 전에 살았던 방식 곧 자기 사욕을 따르지 않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모든 행실을 거룩한 신자답게 그리고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받은 자답게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종말 신앙으로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잘못된 종말 신앙 현실 도피와 내세 집중 신앙

종말 신앙으로 산다는 것이 위와 같은 것이라면, 종말 신앙은 무엇이 아닌가 하는 것도 분명해집니다. 성경적인 종말 신앙은 현실 도피 신앙이 아닙니다. 언젠가 종말이 온다는 것을 내세우면서 현재를 무시하고 외면하는 것이 아닙니다. 현재를 버리고 먼 미래의 일을 내세우며 도망하는 것은 비겁한 신앙입니다.

이단들은 거의 미래를 내세워서 현실을 무시하고 도피하는 길로 나갑니다. 그래서 휴거가 있을 것을 앞세워 현재의 재산이나 가족이나 다른 모든 것들은 쓸모없고 필요 없다고 강조합니다. 그리하여 추종자들로 하여금 휴거와 종말을 맞는 데는 아무런 쓸모없는 재산을 처분하여 교주에게로 가져오라고 합니다. 가족도 떠나서 자기의 단체로 들어오라고 합니다. 그리하여 교주들은 대부분 부자가 됩니다. 교주들은 휴거를 준비하기 위하여 자기 재산을 팔아서 처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신도들의 재산을 빼앗아서 자기 재산으로 축재하지요. 결국 이단에게 속은 신도들은 대부분 알거지가 됩니다. 그리고 가족도 없이 혼자 남게 됩니다. 휴거가 오면 아무것도 필요 없기 때문에 며칠 먹을 쌀과 반찬만 있으면 된다고 거짓말하기 때문이죠. 현실을 도피하게 유도합니다.

그러나 성경적인 종말 신앙은 오히려 현실에 더 충실합니다. 종말 신앙은 현실의 삶을 망각한 내세 집중 신앙이 아닙니다. 물론 기독교는 내세 신앙의 종교입니다. 우리는 장차 우리가 가게 될 천국을 소망하며 삽니다. 요한계시록 7장에서 말씀 하듯이 주님이 오시면 우리는 다시는 주리지도 않고, 목마르지도 않고, 자연 재해도 없고, 눈물도 없고, 보좌 앞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며, 어린양 예수님의 인도를 받으며 그런 세상에서 그렇게 살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지금 이 땅에서 살아가는 현실에 대한 책임도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멀리 있는 내세를 바라보면서 낭만적으로 살거나, 현실은 잊어버리고 아무렇게나 사는 것이 아닙니다. 내세는 우리에게 중요합니다. 그러나 내세 신앙이 현실을 망각하게 만들거나, 그 속에 도망가서 안주해버리는 삶을 정당화하는 것은 성경적인 내세 신앙이 아닙니다. 우리는 오늘을 더 충성스럽게 살아야 합니다.

히브리서 11:13 이하에서는 믿음을 따라 죽고 본향을 바라보며 살았던 믿음의 사람들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히 11:13-14).

그러나 이 말씀은 이 땅에서 사는 모든 생활은 잊어버리고, 현실을 마치 없는 것처럼 무시해버리고, 천국만 바라보며 살았다는 말이 아닙니다. 물론 이 사람들이 다 믿음을 따라 죽었다고 소개되고 , 히브리서 11장 초반부에 등장하는 사람들인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다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순교했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 단락에 나오는 믿음의 영웅들은 아벨을 제외하고, 모두 오래오래 제 명대로 살다가 죽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죽는다는 것이 아니라, 죽는 순간까지 믿음으로 살았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본향을 바라보며 살았다는 것은, 이 땅에서의 삶을 나그네로, 소외 받으며, 이방인 취급 받으며, 외로운 삶을 살았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삶으로써 그들은 지금 본향을 바라보며 살고 있다는 사실을 현실 속에서 증명했다는 것입니다.

  1. 종말 신앙으로 살기위한 결정적인 방편

말씀

우리가 종말 신앙으로 살아가는 데 있어서 결정적인 방편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신약의 마지막 책으로, 종말 시대에 일어날 현상을 말하면서 일관되게 하나님의 말씀을 강조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요한계시록이 마지막에 일어날 일들을 말해주고, 특이한 일들이 적혀있어서 특이한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 요한계시록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일관되게 강조한 책이 없다고 할 만큼 말씀을 강조합니다. 이렇게 요한계시록은 종말 신앙으로 말세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말씀이 얼마나 결정적인 방편이 되는가를 강조합니다.

종말의 시점이 가까울수록 사람들이 가장 극심하게 버리고 또 떠나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입니다. 교회의 강단뿐 아니라 사람들의 생활에서도 말씀이 떠나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와 불신자의 차이가 점점 없어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요한계시록의 교훈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1장 첫머리에서 간단하게 인사말을 한 후,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요한계시록의 첫 마디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계 1:3).

요한계시록의 사실상 첫 마디는 복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그것이 어째서 복이 되는가를 말합니다. “때가 가까움이라.” 그러니까 말세에 대한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말세의 복 있는 자에 대한 말씀입니다. 말세란 어떠한 시대입니까? 혼돈과 고통과 불안과 괴롬과 전쟁 등 온갖 것들이 난무하는 시대입니다. 이런 시대에도 복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말세에 복이 있다고 합니까?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합니다. 말세에 살아남으려면 복을 받아야 하는데, 그 복은 하나님의 말씀과 관련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고 행하는 것이 말세를 사는 사람에게 있어야 하는 복입니다. 말세를 살아가는 가장 중요한 복이 하나님의 말씀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으로 넘어가면 계속해서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들이 나옵니다. 그 편지의 끝마다 똑같은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으로부터 편지를 받는 모든 교회가 동일하게 행해야 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계 2:7).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7, 11, 17, 19; 3:6, 13, 22 등 이렇게 일곱 번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대로 하면, 말세를 사는 신자의 귀는 왜 있습니까?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는 말을 들으라고 있다고 말하는 셈입니다.

여기 “들으라”고 하는 말은 앞서 말씀하신 요한계시록 1:3의 말씀, “읽고 듣고 행하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들으라”는 말은 단지 청각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말씀을 읽고, 그의 말씀을 손과 발로 행하는 것까지 포함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요한계시록 첫 마디부터 하시는 말씀이 신자의 눈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라고 있다는 것입니다. 신자의 귀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라고 있고, 신자의 손과 발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라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런 십자가가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성경은 이것을 십자가라 하지 않고, 말세를 사는 신자에게만 주어진 복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 요한계시록 4장에 넘어가면, 사도 요한이 하늘 어전의 광경을 봅니다. 하늘 문이 열리고 하늘 궁전의 모습을 보는데, 궁전에 앉으신 분이 계시고 거기에 네 생물과 24장로들이 있고, 거기서 장로들은 자기의 왕관을 집어서 던지고 여기저기서 “거룩하다 거룩하다” 하며 찬양을 합니다. 하나님을 최대로 높여 찬양하는 웅장한 궁전의 모습을 봅니다. 그리고 5장으로 넘어가면, 보좌에 앉으신 분의 오른손에 두루마리 책이 하나 있는데, 안팎으로 글자가 가득 쓰여 있습니다. 그런데 일곱 인으로 봉인되어 있어서 볼 수가 없습니다. 장로 가운데 하나가 말합니다. “누가 이 책을 펴거나 보거나 할 이가 있겠는가?” 사도 요한이 기대에 차서 기다립니다. 그런데 땅 위에나 땅 아래나 이 책의 말씀을 열거나 보거나 할 자가 없다고 결론이 내려집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 앞에서 인봉되어 있다는 사실, 그래서 이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을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사도 요한이 통곡합니다. 때로는 자식이 속 썩여서, 인간관계가 잘 안 풀려서, 이런 저런 일들 때문에 통곡하며 운 경험은 많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내 앞에서 닫혀져 있는 것 같다는 사실 때문에 통곡해 본 적은 있습니까?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울었습니다. 그랬더니 장로가 말합니다. “울지 말라.” 그리고는 그 말씀의 봉인을 떼어내고 그 두루마리를 펴고 볼 이가 있다고 말하고는 어린양을 소개합니다. 그리고 보좌에 앉으신 분으로부터 그 인봉된 책이 어린양에게로 건네집니다. 요한계시록 6장부터는 어린양이 인을 하나씩 떼면서 안팎으로 가득히 쓴 책의 내용을 차례로 펼쳐내는 것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요한계시록은 처음부터 끝까지 말씀에 집중합니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 종말 신앙으로 살아가는 신자가 종말의 때를 이기는 비결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요한계시록은 계속 말하고 있습니다. 무엇으로 이길 수 있습니까? 귀를 열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그 말씀으로 이긴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때에, 말세의 때에 이런 유혹들을 이기는 결정적인 무기가 무엇인가? 말씀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계 2:11).

둘째 사망의 해를 이기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계 3:10).

“온 땅에 거하여 극심한 시험이 닥쳐 올 때에 나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그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라.” 시험의 때를 이기는 강력한 무기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 우리 형제들이 어린 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씀으로써 그를 이겼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들의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계 12:11).

믿음의 선배들은 생명을 내놓았으면 내놓았지, 말씀을 포기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이 증언하는 말씀으로써 “그를 이겼다”라고 말합니다. 여기의 “그”는 사탄을 말하는 것입니다.

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계 19:13).

여기 “피 뿌린 옷을 입었다”는 말은 승리했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해서 피 뿌린 옷을 입었다고 말합니까?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기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6장에 가면, 일곱 대접 심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앞에서 계속 이야기한 바와 같이 그 심판을 통하여 말씀하는 것은 결국 두 가지입니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는 것과 역사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진행된다는 것입니다. 17장에서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을 말하는데, 하나님의 심판은 최후적이고 완전하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 심판에 도전하는 세력들이 끝까지 반항하는 것을 밝히고 있지만, 그러나 본문이 계속 초점을 맞춰 따라가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때, 어떤 자들은 불의하다며 대들고, 자기들끼리 대항 세력을 구축하고 하나님과 싸움을 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심판이 옳다. 하나님의 심판이 맞다”고 인정하며 따라갑니다. 결국 말씀은 이 사람들 곧 하나님의 백성이 최후 승리한다는 사실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무서워할 것 없습니다. 요한계시록은 결국 하나님의 백성이 최후 승리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최후 승리하는 수단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으로 최후 승리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말세가 될수록 무슨 신비한 것을 보고 싶어 합니다. 천국 갔다 온 간증을 듣고 싶어 합니다. 종말을 사는 사람일수록 더욱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이 종말하고는 관계가 없습니다. 이미 정해져 있는 것입니다. 뭐가 그리도 궁금합니까? 천국 가보면 확실할 텐데요. 호기심으로 신앙 생활하는 것이 아닙니다. 천국이든지 지옥이든지 갔다 왔다고 요란을 떨며 하는 간증이나 책들은 대다수가 사기입니다. 주관적인 어떤 체험이나 심리적인 작용을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진리로 둔갑을 시켜 사람들을 사로잡으려고 하는 것은 매우 잘못된 것이고 또 위험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승리하는 것입니다.

신약의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이 그 책의 마지막에서 예수님을 누구로 소개하는지 아십니까? 예수님의 칭호를 뭐라고 하는지 아십니까? “이 모든 것들을 증언하신 그가”라고 말합니다. 말씀하신 분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앞에서 마지막 저주와 축복의 선언이 주어지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하며 살았는가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참 놀라운 일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일관되게 말세를 사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과 같다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최후 승리를 맛본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2:18-19을 보겠습니다.

내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증언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계 22:18-19).

말씀을 어떻게 대하는가 하는 것이 무엇과 연결되어 있습니까? 거룩한 성에 참여할 것인가 아니면 배제될 것인가와 직결될 것이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대하는가 하는 점이 중요합니다. 요한계시록 22:20-21을 보겠습니다.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계 22:20-21).

예수님을 어떻게 소개합니까?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말씀하신 분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분이 말합니다.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그랬더니 뭐라고 합니까?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그리고 성도들을 향한 요한의 마지막 축복이 있습니다.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요한계시록은 세상에 아무리 악한 자들이 판을 치고, 아무리 붉은 용이나 여자, 사탄이 세상을 뒤엎고 별별 짓을 다하고 난리를 쳐도, 여전히 하나님이 통치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완전한 의와 공의와 사랑과 그의 나라의 완성을 향하여 지금도 역사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역사를 통치하시는 궁극적인 목적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의 백성들의 최후 승리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은 말세에 극심한 혼란과 불안과 어려움과 고통을 당하는 성도들을 공갈 협박하기 위해서 쓴 책이 아니라, 성도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고 힘내게 하려고 주신 말씀이라는 사실입니다. 이 말씀을 다 들은 사도 요한은 너무나 흥분해서 벌떡 일어서서 외칩니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우리도 이렇게 주님이 오시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주님을 기다리는 삶을 하루하루 살라고 말씀합니다. 그것이 이 말세를 복 있는 사람으로 사는 모습입니다.

성령

말씀과 더불어 성령님은 우리 신자들이 종말 신앙으로 살아가기 위한 결정적인 방편입니다. 성령님을 방편이라고 하면 인격자이신 제3위 하나님을 단순히 어떤 도구 정도로 잘못 취급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오해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령님께서 우리가 종말 신앙으로 이 땅위에서 살아가기 위하여 없어서는 안되는 중요한 분이라는 의미로 말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고 재림하실 때까지의 기간을 이 땅에서 살아가야 하는 신자들에게는 절대로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 중요한 분입니다. 성령이 없이 신자가 홀로 말세의 때를 살아가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도 붙잡히시기 직전에 제자들을 모아놓고 최후의 만찬을 베푸시는 자리에서 행한 마지막 고별 설교에서도 거듭거듭 성령을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승천하시기 직전에도 제자들에게 하신 약속이 성령을 보내주신다는 것이었습니다. 신자들이 예수님이 승천하신 이후부터 다시 오실 때까지 이 세상에서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성령의 역할이 그만큼 필수적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4장에서 16장에 걸친 고별 설교에서 예수님이 성령을 약속하신 말씀들을 보면 예수님이 육신으로 함께 하시지 않는 세상을 살아가는 데 성령이 얼마나 중요하며, 성령의 역할이 무엇인가 등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요 14:16-18).

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어서 이 말을 너희에게 하였거니와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요 14:25-26).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증언하느니라(요 15:26-27).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요 16:7-8).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리라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요 16:12-14).

예수님의 말씀대로 하면, 성령은 예수님 없이 재림 때까지 이 땅에서 신자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 제자들에게 주시는 대안입니다. 예수님이 떠나시면서 예수님 대신으로 제자들에게 보내주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은 예수님이 제자들을 고아와 같이 홀로 두고 떠나시는 것이 아니라는 확실한 증거요, 예수님이 여전히 제자들과 함께 하고 계신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성령은 신자가 재림하실 예수님을 기다리며 하루하루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곁에 있어주는 보혜사입니다. 그는 진리의 영입니다. 그래서 진리의 말씀을 가르치고 또 말씀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분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령은 신자가 세상에서 신자답게 살 수 있는 능력을 주시는 자요, 곁에서 동행하는 자요, 또 보호하고 지켜주시는 자요, 깨닫게 하고 담대하게 하는 자인 것입니다. 결국 신자는 성령과 깊은 관계를 맺지 않고는 결코 신자로서 종말의 시대를 살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말씀대로 하면, 성령이 아니면 예수를 주로 고백할 수조차 없습니다. 예수를 주님이라고 고백하게 하는 것도 성령이고(고전 12:3),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증언도 성령께서 하시기 때문입니다(롬 8:14, 16).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 12:3).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 8:14).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롬 8:16).

또한 성령이 우리의 기도를 도우실 뿐 아니라,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기도 합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롬 8:26-27).

승천 직전에 성령을 약속하신 말씀 가운데서도 우리는 신자가 종말의 때에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성령의 역사가 얼마나 필수적인가를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주님께서 승천하시는 순간에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모두가 선교사가 되라거나 혹은 선교사로 사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하신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모든 신자들이 이 땅에서 제자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것을 가리켜 말씀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오고 오는 모든 세대의 모든 신자들을 대표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에서 예수님은 모든 신자들의 삶의 본질을 예수님의 증인으로 사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그런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성령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리고 그 성령이 오시면 하실 일을 말씀하시는데, 그것은 권능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오시면 주신다는 그 권능은 무엇일까요? 예수님의 증인으로서 살아가게 하는 권능입니다. 그것은 어떤 경우에도 예수님을 증거 하는 삶 곧 어떤 상황에서도 신자로서 살아가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 권능입니다. 예수님의 증인으로 살기 위해서라면 죽음도 당해내고, 고난도 당해내고, 가난도 당해내고, 감옥도 당해내고……무엇이든지 당해내는 권능을 성령이 주신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사도행전은 사도들이 오순절에 성령 충만을 받은 후에 예수를 부인하지 않기 위해서는 어떠한 어려움에도 굽히지 않고 그 핍박들을 다 당해내는 이러한 능력을 행사하며 증인으로서 사는 모습을 여러 곳에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도 이런 장면을 보여줍니다. 요한계시록 12:11입니다.

또 우리 형제들이 어린 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씀으로써 그를 이겼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들의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계 12:11).

사도 바울이 말씀한 것처럼 성령은 신자들의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심으로 신자답게 살 수 있는 권능을 주십니다(엡 3:16).

지금까지 본 바와 같이 성령은 신자들이 예수님의 재림을 바라보며 이 땅에서 하루하루 살아가게 하는 구체적인 방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성령이야말로 말씀과 더불어 신자들이 종말 신앙으로 이 땅에서의 삶을 살아가게 하는 구체적인 방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말세를 살아가는 신자들을 향하여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 고별 설교에서 약속하셨고, 또 승천 직전에 약속하신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신자로서의 삶을 살아갈 수 있다고 강조하는 것입니다. 성령과 더불어 그리고 성령의 역사로만 우리는 종말의 때에도 두려워하거나 좌절하거나 원망하거나 변절하지 않고 오히려 고난과 죽음 가운데서도 굴하지 않는 신자의 권능을 행사하고, 오히려 찬송을 부르고 감사하며 종말 신앙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엡 5:18-21).

말씀과 함께, 그리고 성령과 함께 하루하루 삶의 현장을 종말 신앙으로 살아가는 복된 신자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정창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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