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를 위한 신학

하나님의 관심은 사람이다

정창균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눌 주제는 성경이 말하는 인간론입니다. 사람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인 것입니다. 오늘은 사람에 대한 말씀을 세 가지 점에서 나누려고 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관심은 사람이다는 말씀입니다. 둘째는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의 핵심은 구속사적 관심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에 대한 관심은 사람을 구원하고 거룩하게 하고 결국 영화롭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를 유지하는데 결정적인 장애가 되는 것으로 세속화의 문제를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집중적인 관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관심을 갖지 않고 점점 하나님에게서 떠나가는 현상입니다.

하나님의 최대의 관심인 사람

창조 이전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마지막 까지 하나님의 최대의 관심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이 사람에게 집중되어 있다는 것은 성경 전반에 걸쳐서 밝히 드러나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최대의 관심은 사람이라는 사실은 창조의 현장에서도 밝히 드러납니다. 사실 창조의 현장은 하나님께서 얼마나 사람을 귀하게 여기셨는가를 보여주는 생생한 증거이기도 합니다.

1) 매일의 창조가 끝날 때마다 반복되는 확인은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하나님은 매일의 창조를 즉흥적으로 하시지 않았으며 사전 계획과 기준을 갖고 하셨다는 명백한 증거이기도 합니다. 기준이 있었으니 그것이 좋았다는 판정, 즉 만족하셨다는 판정을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절대자의 기준으로 볼 때 좋을 만큼 좋게 창조하셨습니다. 모든 피조물들을 모두 그렇게 좋게 창조하신 다음 맨 나중에 드디어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창조의 수준만이 아니라, 순서에도 계획이 있었습니다. 사람을 의도적으로 모든 창조가 끝난 후 맨 나중에 만드시고 그들에게 지금까지 만드신 모든 피조계를 맡기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창조하시는 의도가 무엇인가는 사람 창조가 다 끝나고 나서야 알 수 있습니다. 한 마디로 하면 사람 주려고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창조가 다 끝난 다음의 말씀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의 창조는 그 방법도 내용도 다른 피조물의 창조와는 확연히 달리 하셨습니다. 직접 빚어서 만드셨고, 또 하나님과 공통적인 부분이 있게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과 통하는 부분이 있게 만드신 것입니다. 사람을 다 만드신 다음에는 그들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그 복의 구체적인 내용이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창1:28)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껏 창조하신 다른 피조물들을 놓고 사람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에게 주노니”(29절), “너희에게 주노라‘(30절). 즉 이 모든 것들을 다 사람에게 주려고 그렇게 만드셨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2) 뿐만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것(모든 피조물을 사람에게 주는 것)을 매우 기뻐하셨습니다. 생육하라, 번성하라,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땅을 다스리라는 명령은 군주의 엄위한 명령 혹은 추상같은 불호령투가 아니라 송영적 특징을 갖는 어투(Doxological)로 기록되어 있음을 주목해야 합니다.(월터 브루그만, 구약신학과의 만남 P.61). 하나님이 모든 피조물을 사람에게 주시는 것을 얼마나 기뻐하시고, 즐거워하시는가를 암시하고 있습니다. 즉 축제적인 분위기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특혜를 받은 인간이 하나님을 배신하고 반역해버릴 수도 있는 가능성을 보장하셨습니다. 그렇게 보면 사실 하나님이 모든 피조물을 인간에게 맡기신 그것은 “매우 위험한 모험”이었습니다. 그 후에 사람이 하나님을 어떻게 반역했는가를 보면 알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하나님은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3) 인간만이 하나님과 통하게 하려고 하나님과 공통적인 부분이 있게 창조하셨습니다. 당신의 형상을 사람에게 두신 것입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는 절대로 공유할 수 없는 하나님만 독특하게 가지신 속성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하나님과 사람이 공통적으로 공유하고 있는 속성이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특별한 배려요, 놀라운 대우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만들어서 거기 놓고 로봇처럼 조정하고 부릴 대상으로 창조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를 맺고 함께 살아갈 대상으로 창조하셨습니다. 이것은 다른 어떤 피조물과도 다른 인간만의 독특한 점입니다. 인간은 개나 돼지와 같을 수 없습니다. 개나 고양이가 인간과 같을 수도 없습니다. 근래에 애완동물에 대한 관심이 깊어지고 보편화 하면서 기이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집에서 기르는 애완견을 두고 자기의 자녀처럼 말하거나 자기 자녀의 형제 자매인 것처럼 말하는 것이 자연스러워지고 있습니다. 개를 기르다보면 정이 듭니다. 그리고 사랑스럽습니다. 그러나 개가 나의 자식일 수는 없습니다. 내 아들이 강아지의 오빠일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사람을 개로 만들 수도 없고, 개를 사람으로 만들 수도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언어를 매우 사려 깊게 사용해야 합니다. 생명있는 것들을 사랑하고 같이 교감을 하고 귀여워해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 하나님이 만드신 생명체를 아끼고 잘 관리하고 사랑하는 우리의 책임이기도 하고 우리에게 주신 특별한 복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애완동물을 사랑하고 정이 들었다 해도 강아지가 사람이 되지는 않아요. 우리가 아무리 개하고 잘 통한다 그래도 우리가 개가 되지는 않아요. 그런데 너무나 자연스럽게 많은 분들이 자기가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를 놓고 “엄마 기다렸어?” 그래요. 들어오면서 “어 알았어, 알았어 오빠가 해줄 거야” 그래요. 그러니까 강아지를 자기의 딸로 만들기도 하고, 아들의 자매로 만들기도 하는 거지요. 사람을 강아지로 만드는 건지, 개를 사람으로 만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오해하지 마세요. 애완동물을 키우거나 애완동물을 사랑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해야지요. 우리는 심지어 꽃 한 송이 나무 하나를 보고도 예쁘면 가서 말을 걸듯이 참 예쁘다, 너 여기만 있는 게 아깝다. 사람이 많이 다니는 곳에 있으면 더 좋을걸 하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엄마로 혹은 내 딸의 오빠로 말하지는 않습니다. 우리 신자들은 일상의 말도 성경적으로 해야 되는 것입니다.

4) 하나님은 사람에게만 하나님을 향한 자신의 사랑을 의지적으로 결정하고 그것을 하나님께 표현할 기회를 부여하셨습니다. 선악과가 그것입니다. 선악과는 올무이거나 함정으로 부여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기회로 부여된 것이었습니다. 자신의 자유로운 의지로 처신을 결정하고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절대 신뢰와 사랑의 증거가 되는 것은 모든 피조물 가운데 인간에게만 부여된 기회였습니다. 선악과 명령이 없다면 인간은 아무리 하나님을 사랑해도 그것을 당당하게 표현할 기회를 가질 수 없습니다. 따먹고 싶은데도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여 유혹을 극복하고 순종함으로써 자신이 그렇게나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음을 당당하게 드러낼 기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악과 명령은 그 과일 자체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 과일을 빌미로 형성된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문제입니다.

5) 그러나 사람에게 그렇게 하시고 하나님이 인간에게 돌려받은 것이 무엇인가,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께 그런 대접을 받고 인간이 그 자리에서 하나님께 돌려드린 것은 무엇이었는가를 살펴보면 매우 충격적입니다. 사람은 그 자리에서 하나님께 돌려차기를 해버린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에덴에서 일어난 사람의 하나님 반역사건입니다. 우리는 교회에서 신앙생활하면서 자주 상처받았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교회를 그만 나와겠다고 떼를 쓰기도 하고, 일을 그만두겠다고 협박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역사상 가장 큰 상처를 최초로 받은 이는 바로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상처를 바로 사람에게 받으셨습니다. 그 자리에서 돌려차기당한 상처받은 하나님이 그럼에도 그 자리에서 하신 일은 바로 그 인간을 위하여 가죽 옷을 지어 입히고 돌아서서 뱀의 머리를 밟고 인간을 구원 할 여자의 후손을 준비하시는 일을 시작하신 것입니다. 그 역사의 진행으로 결국 하나님 자신이신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이고, 죽으신 것입니다. 이 모두가 사람 때문에 일어난 일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그 역사가 진행되고 있고, 주님이 재림하실 때 까지 사람 구원의 일은 계속 될 것입니다.

지금까지 그리고 마지막 날까지 하나님의 최대의 관심은 사람입니다. 사람을 구하기 위하여 사람으로 오신 하나님이 바로 예수님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사역을 하시는 동안 가장 집중적인 관심을 쏟은 것도 바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어린 아이 한 사람을 어떻게 귀하게 여기셨는가를 우리는 너무나 분명히 압니다. 그는 당시 세도가들에게 먹기를 탐하고 마시기를 즐기는 인물, 혹은 죄인과 세리들과 한 패거리라는 오명을 뒤집어쓰면서도 일관되게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행적을 이어갔습니다. 사람을 함부로 여기며 자기들의 전통이나 정치적 종교적 잇속을 위하여 사람을 무시하거나 괴롭게 하거나 함부로 취급하는 사람들을 무섭게 질책하고 비난하는 일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그는 한 사람의 인간회복을 위해서라면 돼지 2천마리의 엄청난 재산 손실도 개의치 않았습니다. 이렇게 보면, 하나님은 사람 때문에 천지를 창조하신 것이고, 사람 때문에 아들을 죽이셨습니다. 그리고 사람 때문에 주님은 다시 오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죽음의 십자가를 코앞에 두고 행한 고별설교를 시작하는 첫 마디에서 이 사실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배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14:2-3).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천국의 주인공은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사람을 위한 처소를 예배하러 가신다고 하셨습니다. 처소가 마련되면 다시 오셔서 사람을 영접하여 천국에서 함께 있게 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보면 천국은 왜 있을까요? 사람 때문에 있습니다. 창조 때 에덴이 사람을 위하여 있었듯이, 새 하늘과 새 땅인 천국도 사람을 위하여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계획이고 뜻입니다. 그곳에서 사람은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과 어린양 예수를 경배하고 찬양하며 영원히 삽니다. 인간의 가장 큰 영광과 행복과 가치는 하나님을 경배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데 있습니다.

이 사실이 갖는 두 가지 의미

하나님의 최대의 관심이 사람이라는 사실은 우리에게 두 가지 교훈을 분명하게 제시합니다. 첫째, 하나님이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시고 최대의 관심으로 여기는 우리 자신에게 우리도 최대의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귀하게 여기신다는 사실을 근거로 우리도 우리 자신을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우리의 재력이 아닙니다. 우리의 학벌이 아닙니다. 우리의 명예가 아닙니다. 그것들은 우리 자신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무엇이 아니라, 우리 자체에 관심이 있으십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우리가 내는 헌금이나 헌신이나 봉사가 아닙니다. 우리의 어떤 조건이 하나님의 목적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관심을 가지시는 그 요소들로 우리도 우리 자신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존재라는 사실, 하나님의 언약백성이라는 사실로 자신에게 관심을 갖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백성, 구원받은 자녀,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살아갈 존재로 자신을 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에 걸맞게 사는 일에 가치를 두고, 그것을 큰 행복과 명예로 여기며 사는 것입니다. 이것을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 합당하게 사는 것이라 했습니다. 하나님의 저울로 달아볼 때 무게가 나가는 삶을 산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가치기준으로 판단할 때 값이 나가는 인생이라는 말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우리의 행동에 여하에 따라 우리를 좋아하시거나 싫어하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사용가치에 따라 귀하게 여기시기거나 하찮게 여기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범죄하고 실패할 때도 하나님은 우리를 끊어버리지 않고 여전히 우리에게 관심을 가지십니다. 요나는 하나님이 직접 주신 명령을 거부하고 하나님을 피하여 도망하려 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요나를 그 자리에서 끊어 내쳐버리지 않았습니다. 요나를 포기하고 잊어버리지도 않으셨습니다. 요나 한 사람을 변화시키고 회복시키기 위하여 끝까지 그를 추적하시고 체포하시고 물고기 배속의 시련을 당하게 하시면서 다시 한 번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하나님께 대들고 분노하고 하나님을 조롱하는데도 하나님은 끈질기게 요나를 기다리시고 설득하시며 하나님이 정하신 곳까지 이끌어 가십니다. 바로 거기에 요나의 존재와 인생의 가치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직도 그를 귀하게 여기시니까 범죄자임에도 요나의 인생은 여전히 귀한 것입니다. 아무리 재산이 많고 학벌이 좋아도 하나님이 관심 없어 하는 사람이라면 그의 존재는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우리의 진정한 가치는 우리가 벌어서 획득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귀하게 여겨주시니 우리 존재가 귀하고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자기 자신을 그렇게 여겨야 됩니다. 하나님이 불순종하고 범죄 한 나를 단번에 없애버리거나 관심을 끊어버리지 않으시고 징계하시면서라도 여전히 관심을 갖고 고치려하신다면 그 사실로 우리 인생은 하나님의 관심을 받는 귀한 존재인 것입니다. 죄를 범하고 타락하였는데도 하나님이 아무런 관심 없이 놓아두시면 사생자로 취급하시기 때문이고, 징계하신다면 아들로 여기시기 때문이라는 것이 히브리서 기자의 가르침입니다.

둘째, 다른 사람에 대하여도 사람자체에 최대의 관심을 갖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 일을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지금 이곳에 계신다면 직접 하실 일을 우리를 불러서 대신 하도록 하신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도 자기가 교회의 일군으로 사역을 하는 것을 두고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육체에 채운다.”(골1:24). 그러므로 교회의 일을 가장 잘 하는 것은 하나님이 직접 하신다면 하실 방식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직접 교회 일을 하신다면 반드시 사람을 가장 중요하게 여길 것은 확실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교회 일을 할 때는 사람을 중요하게 여기는 원리로 일을 하는 것이 가장 잘 하는 사역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언제나 사람에게 있으므로, 하나님의 일로서 가장 잘하는 방법도 당연히 사람에게 초점이 맞추어진 사역일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므로 너무 많은 사역자들이 사람보다는 에 관심을 집중하는 것은 그 일을 맡기신 하나님의 방식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구원역사라는 일을 성취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죽이신 것이 아닙니다.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죽이는 구원역사라는 일을 행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나 지금이나 일을 위해서 사람을 동원하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사람을 위하여 일을 동원하시는 것입니다. 만약 일의 성취나 혹은 효율성이나 경제성을 위해서라면 하나님은 굳이 사람을 동원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부리시는 천사 하나를 동원하여 세상의 모든 사역자들이나 신자들이 모여서 하는 일보다 훨씬 더 큰일을 훨씬 더 빨리 훨씬 더 효과적으로 하실 수 있습니다. 아니 그분은 지금도 창조 때처럼 말씀 한 마디로 무엇이든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굳이 그 답답함을 참아가면서 사람을 동원하여 일을 하려하시고, 또 새로운 일들을 자꾸 만드시는 것은, 사람을 복되게 하고, 그들의 삶을 의미 있게 하고, 영광스럽게 해주기 위한 열심 때문입니다. 이러한 원리는 신자의 모든 삶에서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가정에서 자녀를 대할 때도 부모는 자녀의 성적이 아니라, 자녀 자신에게 최대의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아내는 남편의 월급이 아니라, 남편 자신에게 최대의 관심을 갖고 남편 자신을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아내를 대하는 남편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서 우리가 다른 사람을 대할 때 명심할 것도 하나님이 그 사람을 귀하게 여기신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사람을 위해서도 죽으셨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다른 사람을 대하는 것입니다.

물론 인간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전적으로 타락하고 부패한 죄인입니다. 우리는 죄를 범해서 죄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죄인이어서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죄인으로 태어납니다. 다윗이 모친이 죄 가운데서 나를 잉태하였다고 말하는 것은 자기의 범죄의 책임이 어머니에게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태어날 때부터 죄인이라는 고백입니다. 우리 인간은 전적으로 부패한 별 수 없는 죄인이라는 것은 굳이 개혁신학의 인간론을 철저하게 공부해야만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개혁신학의 인간론을 공부할 필요 없이 양심만 제대로 가져도 우리가 얼마나 부패한 죄인인가를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신자인 우리는 아주 중요하고 귀한 사람들입니다. 우리 존재는 가치가 있고 의미가 있습니다. 죄인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죄인임에도 하나님이 관심을 기울이시고 이끄시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우리 자신에 대하여도,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도 이러한 생각으로 관심을 갖고 그의 존귀함과 가치를 인정하며 대해야 합니다.

구속사적 관심

하나님의 최대의 관심은 사람이라는 것은 알겠는데 그러면 하나님의 관심은 사람의 무엇에 대한 관심인가 하는 것이 궁금합니다. 사람을 어떻게 하시려고 이렇게 관심을 쏟으시는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은 크게 세 가지 내용입니다. 첫째는 사람을 구원하시려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하나님은 독생자 그리스도를 인간으로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은 죄인 취급을 받으시며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죄인인 인간이 구원을 얻을 구원사역을 이루셨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거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두 번째 내용이 있습니다. 구원하신 사람을 이 땅에서 사는 동안 거룩하게 살게 하려고 모든 관심을 기울이십니다. 이것을 신학 용어로 말하면 성화라고 하지요.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전서에 한 말씀대로 바꿔서 말하면 하나님께 합당한 사람으로 살게 하려는 것이에요. 에베소서에 있는 말로 말하면 사람을 잘 준비시키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그를 온전하게 하려는 것이지요. 빌립보서의 말씀으로 하면 마음에 선한 소원을 갖게 하시고 그리스도 예수께서 오시는 날까지 완성해나가시려는 것이지요. 어떤 사람들은 구원은 하나님의 사역이고, 성화는 사람의 책임이라고 잘못알고 있습니다. 성화는 구원받은 사람들이 자기 책임으로 이루어내어야 할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구원해 놓으시고 이 인간들이 자기 책임을 수행하는지 하지 않는지 감시를 하는 차원에서 사람들을 살펴보시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하신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은 이들이 거룩한 삶을 사는지 살펴보시는 것 뿐만이 아니라, 거룩한 삶을 살도록 이끄시기 위하여 관심을 쏟으시는 것입니다.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신다”는 것이 사도 바울의 말씀입니다(빌1:6). 우리의 성화는 전적으로 우리의 책임인 것이 아니라, 그것도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는 분명한 선언입니다. 셋째로, 하나님의 사람에 대한 관심의 절정은 그를 영화롭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모습과 똑같이 영화로운 모습이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늘로부터 다시 오시는 날 그분은 낮고 천한 우리의 몸을 그리스도 자신의 몸처럼 영화롭게 하신다는 것이 빌립보서에서 사도 바울이 힘주어 가르치는 말씀입니다(빌3:21). 이렇게 볼 때,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의 핵심이 무엇인가는 분명합니다. 첫째 사람을 구원하고, 둘째 그 사람을 거룩하게 하고, 세째 그래서 결국 그 사람을 영화롭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번에 이루지는 단회적 사건이나 이벤트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시간과 공간 속에서 점진적으로 이루어가는 역사입니다. 개인적으로 보아도 구원을 받고 살다가 죽어서 주님 앞에 갈 때까지 평생 동안 이루어지는 진행형의 일입니다. 역사적으로 보아도 에덴 동산에서부터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진행되는 긴 역사입니다. 이런 점에서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은 구원 역사적 관심 혹은 구속사적 관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르심

하나님의 사람에 대한 이와 같은 구원역사적 관심 혹은 구속사적 관심의 궁극적 의도가 어디에 있는 것인가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백성의 형성에 있습니다. 각 사람을 구원하고 거룩하게 하고 영화롭게 하여 결국 무엇을 이루고자 하시는가 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형성하고 하나님의 백성을 이루어내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사람을 개별적으로 구원하십니다. 가족 단위나 민족단위로 구원하시지 않습니다. 개인 개인을 부르시고 구원하십니다. 그러나 그 개인을 하나님의 나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불러내십니다. 개별적으로 구원하시지만 그들이 구원을 받은 사람으로 등장하는 곳은 하나님 나라의 구성원으로,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의 일원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각 사람은 개별적으로 불림을 받지만 그가 불려내지는 곳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은 정창균이라는 개인을 불러내셨지만 저를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불러내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관심이 언제나 하나님과 나 사이의 개인적인 문제나 개인의 축복 등에만 집중되는 것은 잘못입니다. 하나님은 개인을 구원하여 무엇을 하시려는가를 늘 마음에 담고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지나치게 개별화 되어 있고, 신앙공동체적인 관심이 약한 것은 우리의 큰 약점입니다. 개별신앙만이 아니라, 우리 신앙의 공적차원과 공적책임 등에도 관심을 갖고 그 책임을 수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고 그의 백성을 형성하는 것이 하나님의 궁극적인 의도였다는 것은 에덴동산에서부터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시고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약속을 하실 때 그것은 단순히 하나님과 아담 사이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약속하실 때 이미 이들로 말미암아 이루어질 땅에 충만하고 땅을 정복할 그 사람들을 내다보고 그들도 대상으로 삼고 계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들이 타락해버린 현장에서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창3:15). 그리고 12장에 가면 여자의 후손으로 올 사람의 계보가 될 역사를 시작하십니다. 아브라함을 불러내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명령과 약속을 하십니다.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창12:1-3). 에덴동산에서 약속하셨던 여자의 후손의 역사가 아브라함을 통하여 이루어질 것을 보여주시는 대목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단 둘이서 명령과 약속을 하시면서 사실은 아브라함을 통하여 이루어질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다가의 모래와 같을 큰 민족을 이미 내다보시면서 이 약속을 하시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브라함 개인과 약속을 하시면서 눈은 앞에서 약속을 하고 있는 아브라함 개인을 넘어서 그를 통하여 이루어질 그 나라와 그 백성을 바라보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출애굽기에 오면 모세를 통하여 이끌어내는 그 백성에게 초점이 맞추어집니다. 아브라함을 불러서 민족(나라)을 이루시겠다는 하나님의 의도는 이렇게 구체적인 진행의 과정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출애굽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는 내 백성이 되리라.” 그리고 이 말씀은 이후에 아주 특별한 의미로 하나님의 나라와 그 백성을 일컫는 독특한 표현이 되었습니다. 사실 하나님의 역사진행은 이렇게 하여 부르신 그의 나라와 그의 백성 중심의 역사입니다. 예수님이 오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은 각 개인을 구원하셔서 그들로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백성을 이루시는 역사의 절정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 나라와 이 백성은 궁극적으로는 요한계시록에서 드러나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새 하늘과 새 땅으로 표현된 그 나라와 그 땅으로 완성이 될 것입니다. 모든 구원받은 자들은 그 나라의 백성이 되고, 그 나라의 왕이신 하나님을 경배하며 찬양하며 영원히 영화로운 모습으로 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종국적으로 이루고자 하시는 그 나라, 그 백성의 이 땅에서의 모습이 바로 교회입니다. 매우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루실 그 나라를 이 땅에서 맛볼 수 있는 것이 교회입니다. 그의 나라요 그의 백성들의 공동체가 바로 교회인 것입니다. 우리는 종국적으로는 천국에서 완성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영원히 살 것입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는 교회의 일원으로 살면서 하나님 나라를 맛보기도 하고, 하나님 나라 백성의 복된 책임을 감당하기도 합니다. 구원받은 신자는 이 땅에 사는 동안 하나님이 세우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 나라의 일부 혹은 그림자라고 할 수 있는 교회에 속하여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종국적으로는 천국의 하나님 나라로 우리를 부르셨듯이, 이 땅에서는 구원하신 우리를 교회로 부르셨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세속화하나님께 등 돌리기

하나님의 일관된 최대의 관심은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최대의 관심도 하나님에게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최대의 관심을 갖고 살 때 인간은 가장 행복할 수 있고 또 그 존재가 영광스러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지속적으로 하나님에게서 눈을 돌리려고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관심을 집중하지 못하도록 우리를 유혹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다름 아닌 세속화입니다. 세속화의 유혹을 거부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세속화란 단순히 돈을 좋아하거나 세상의 노래를 좋아하거나 세상 사람들처럼 옷을 입는 등 어떤 단편적인 행동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속화는 하나님 지향성, 하나님 중심성에서 인간 지향성, 인간 중심성으로 방향 전환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서 있던 모습으로부터 세상을 향하여, 인간을 향하여 돌아선다는 말입니다. 방향 전환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등 돌리기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중심의 가치관, 하나님 중심의 역사관, 하나님 중심의 인생관으로부터 인간 중심의 가치관, 인간 중심의 역사관, 인간 중심의 세계관, 인간 중심의 인생관으로 돌아간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은 부패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향할 것인가, 세상을 향할 것인가의 문제를 극명하게 잘 드러내주는 본문이 있습니다. 요한일서 2:15-17절입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이 말씀은 두 대상을 구별하여 명백하게 대조를 시키고 있습니다. “아버지”라는 말로 표현된 한 주체가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으로 표현된 또 하나의 주체가 있어서 대조를 이룹니다. 계속 “세상”, “세상에 있는 것”, “세상” “세상” “세상”이 이어집니다. 그리고 “아버지” “아버지” “하나님”이 세상과 대조를 이루며 등장합니다. 세상과 하나님의 대조입니다. 그리고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라는 말로 요약을 합니다. 그리고 이것들은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는 말로 아버지와 대조를 시킵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하면서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과,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를 대조시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세상이 주는 것, 그러므로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은 지나가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은 영원히 거한다는 말로 두 대상이 극단적으로 대조가 되는 운명에 처할 것을 선언합니다. 이 말씀은 결국 세상과 하나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는 사람과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을 대조시키면서 그러므로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 혹은 세상이 주는 것을 향하지 말고 하나님을 향하라는 메시지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이렇게 도전하고 있는 셈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편에 속할 것인가? 그 반대편에 있는 세상을 사랑하고 세상의 뜻을 행하고 세상을 따라갈 것인가? 그러면서 분명하게 말합니다. 세상에 있는 것, 세상, 세상에 속한 것들은 다 지나간다, 없어진다고 그럽니다. 그러면서 아버지를 사랑한 것,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 그래서 아버지가 주시는 것, 다시 말하면, 아버지에게 속한 것은 영원히 있다고 합니다. 이렇게 도전하는 의도는 분명합니다. 세상과 하나님, 세상에 있는 것과 하나님이 주시는 것 가운데 무엇을 향하여 설 것인가를 결정하라는 것입니다. 사라져버리는 세상을 향하지 말고, 영원히 있는 혹은 영원한 것을 주시는 하나님을 향하라는 경고이기도 합니다.

세속화의 명분과 초래되는 결과

앞에서 강조한 바와 같이 세속화는 결국 하나님을 향하던 자리에서 세상을 향하는 자리로 그 방향을 전환하는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우리가 하나님을 향하고 하나님 중심의 태도를 갖게 되면 하나님에게 예속되어 하나님의 노예가 되고 인간성을 상실하게 되어 비인간화의 현상이 초래된다고 주장합니다. 세속화는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을 가치의 중심에 두므로 이곳에서 드디어 인간의 존엄이 실현되고 인간회복이 극치에 이르게 된다고 주장합니다. 그것은 인간이 그렇게나 선한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모르거나 일부러 무시하는 데서 오는 착각입니다. 아이러니컬 하게도 인간 중심성은 인간 존엄이 아니라, 인간 상실을 초래합니다. 인간 중심성은 필연적으로 자기 중심성으로 가게 됩니다. 인간이 가장 중요하고 인간이 최고의 가치라고 주장하면서 그것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사람들은 점점 인간중심성에서 더 나아가 자기중심성을 추구하게 됩니다. 자기중심성이 지나쳐서 결국 지독한 이기심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게 됩니다. 자기가 최우선이 되고 자기가 중심이 되려는 탐욕을 본질로 하는 자기중심성이 서로서로에게 발동하는 곳에서는 필연적으로 인간상실을 초래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자기가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가고,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는 무자비하게 되는 현상을 필연적으로 초래합니다. 이러한 상황 아래서 인간성 상실이 필연적입니다.

진정한 인간의 가치와 인간성 회복은 하나님 중심성 안에서만 보장될 수 있습니다. 인간의 가치와 존엄의 보장을 인간의 생명과 인권의 존엄성에 절대적인 근거를 두게 되면 진정한 인간의 존엄성은 확보할 수 없게 됩니다. 인간의 존엄성과 진정한 가치는 그 생명의 존엄성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셨다는데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을 창조하셨지만 인간은 달리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인간과는 다른 어떤 피조물과도 다른 특별한 관계를 맺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인간에 최대의 관심을 가지시며, 또 인간을 존귀하게 여기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귀하게 여기는 인간을 함부로 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는 이 사실에 근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배제한 인간은 많은 동물 가운데 한 동물일 뿐입니다. 인간은 정치적인 동물이고, 사회적 동물이고, 생각하는 한 종류의 동물이 될 뿐입니다. 여전히 동물일 뿐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중심, 나아가 자기중심이 보편화된 말세를 이렇게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 7장 31-35절입니다. 이 세대의 사람들을 비유로 말한다며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는가? 이렇게 질문을 던진 다음에 예수님이 답을 하십니다.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서로 불러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하여도 너희가 울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세례 요한이 와서 먹지 아니하며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며 너희 말이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너희 말이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장터에 애들이 앉아서 놀고 있습니다. 이건 그냥 놀이입니다. 아이들이 장터에 모이면 하는 게임인데 게임에는 늘 일정한 규칙이 있습니다. 이 놀이가 게임으로서 계속 돌아가고 운영이 되려면 누구나 다 이 규칙을 지켜야 합니다. 이것이 게임을 게임으로 돌아가게 하는 근거요 질서요 약속입니다. 게임에 참여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이 룰을 지켜야만 게임이 유지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게임이 유지되지 않지요. 애들이 두 패로 나눠서 한쪽에서 피리를 불면 다른 쪽에 있는 애들이 노래를 하고 그 곡에 맞춰서 춤을 춰야 합니다. 그리고 한쪽에 있는 애들이 곡을 하면 다른 쪽에 있는 애들은 그 곡을 듣고 울어야 합니다. 그래야 게임이 되지 안 그러면 게임이 유지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한쪽 애들이 피리를 부는데 저기 있는 애들이 춤추지 않고 가만히 있는 거예요. 그러면 이 게임이 깨져 버리는 거지요. 저쪽에 있는 애들이 아이고 아이고 하며 곡을 했습니다. 그러면 이편에 있는 아이들은 울어야 해요. 그런데 이 아이들이 멀뚱멀뚱하고 울지를 않습니다. 곡을 하는 데도 구경만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게임이 더 이상 유지되지 않는 거지요. 왜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 한 사회로 놓고 본다면 그 사회가 사회로서 유지가 되게 하고 돌아가게 하려면 그 사회에 속한 사람들이 서로 약속된 질서를 지켜야 합니다. 그런데 그걸 안 지켜요. 그래서 야, 내가 피리를 부는데 너희들 왜 가만히 있어? 그랬더니 춤을 안 춘 애들이 뭐라 그럴까요? 피리 부는 게 너 좋아서 하는 건데 내가 왜 춤을 춰? 나는 좋은 거 하나 없는데, 하며 안 추는 겁니다. 그리고 또 야, 곡을 하면 울어야지 너 왜 안 울어? 그러니까 나는 슬픈 일 없는데 내가 왜 울어? 그러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비유 가운데서 직설적으로 이렇게 말씀하시지는 않았지만 이 시대를 빗대어 이런 비유로 말씀하신 데는 이것을 말씀하시고자 한 것입니다. 비유에 세례 요한과 예수님에 대한 바리새인들의 반응을 덧붙여 놓은 의도도 그들의 지독하게도 자기중심적인 생활태도를 지적하려는 것입니다. 세속화가 진행되면 마지막에 이르는 종착점이 이것입니다. 지독한 자기중심주의요 지독한 이기주의로 귀결됩니다.

이렇게 보면 결국 지독한 자기 이기주의로 이끄는 세속화, 그것은 무서운 죄입니다. 남의 아픔에 내가 전혀 아프지 않고, 나 하나 좋으면 됩니다. 남의 즐거움에 박수가 쳐지지를 않아요. 우리가 지금 이런 사회 풍조에 의해서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그런 삶을 살도록 내몰리고 있습니다. 이것이 더 심화되면 가정에까지 침투해 들어옵니다. 부부 사이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부모와 자식 사이도 그런 관계가 될 수 있지요. 디모데후서 3장 1-5절까지 봅니다.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말세는 고통의 때인데 그 고통의 핵심이 무엇인가 하면, 자기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말세에 당하는 모든 종류의 고통의 뿌리는 자기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세속화의 종착점입니다. 지독한 자기중심주의와 지독한 이기주의입니다. 이와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너는 마음을 착하게 가져. 너그럽게 가져.’ 그런 말일까요? 아닙니다. 근본적인 방향, 경건의 문제를 얘기하고 있습니다. 세속화의 방향에서 하나님을 향한 곳으로 방향을 바꾸라는 겁니다. 영원을 향한 신앙을 가지라는 거예요.

이원론의 위험

우리가 앞에서 본 요한일서 2장의 핵심메시지는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라는 것임을 이미 확인하였습니다. 그러나 세상과 하나님 가운데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다는 것이 무슨 말인지 혼돈하지 않아야 합니다. 이 말씀이 하나님을 향하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하나님 우선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세상을 버려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세상과 하나님에 대한 이원론적인 분리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둘을 놓고 이것은 물리쳐 버리고 저것만 가져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원론적인 분리가 아니라 우선순위의 문제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단순히 이원론적으로 생각하니까 문제가 생깁니다. 모든 세상의 것을 성(聖)과 속(俗)으로 나누고 이것은 버리고 저것은 붙잡는 식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태도가 극대화되면 아주 비정상적인 생활태도가 나타나게 됩니다. 직장에 가서 일하는 것은 세상일이 되고, 교회 와서 교사 하는 건 거룩한 일이 됩니다. 부부가 살면서 부부관계를 맺는 것은 속되고, 주의 일을 하는 것은 성스러운 것이 됩니다. 내가 나가서 하루를 열심히 사는 건 세상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이고, 교회 나와서 전도하는 것은 거룩한 일 하는 것이 되지요. 모든 생활을 성과 속으로 나눠요. 심지어 거룩한 것에 속하는 것을 특별히 항목화해서 그것에 몰입을 하고 다른 것에는 가치를 부여하지 않고 별거 아닌 것처럼 평가합니다.

이러한 삶이 극단적으로 행해지면 현실을 아주 무시하거나 현실을 아예 배제해 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기도원에 가는 게 가장 행복한 일이 됩니다. 직장은 다 때려 치고 교회에만 와 있으면 그 때가 가장 편안하고 행복한 겁니다. 그게 극단화 되면 결국 다같이 속세를 떠나 산속에 가서 믿는 사람끼리 모여서 서로 물건을 통용하며 정말 행복하게 신앙에만 전념하면서 천사처럼 살자! 그런 일이 가끔 생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현실을 회피하는 겁니다. 멀리 바라보이는 피안을 동경하며 현실을 회피해요. 내세 중심적으로 산다는 명분으로 사실은 현실 도피적 삶을 삽니다. 때로는 구름 위에서 사는 것처럼 현실을 떠나서 살려고 합니다. 세상은 다 썩을 것이고 필요 없는 것이다. 곧 주님이 오시는데 그런 부패한 것들은 다 무시하고 한데 모여서 주님을 기다리며 거룩하게 살자.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산다는 것은 이와 같은 이원론적 생활을 말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께 최대의 관심 갖기

하나님의 최대의 관심은 사람입니다. 우리가 바로 그 대상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최대의 관심도 하나님이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최대의 관심을 갖고 일상의 삶을 산다는 말은 구체적으로는 세 가지의 삶의 태도를 말합니다. 첫째는 하나님 지향성입니다. 이것은 우리 생활의 방향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향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둘째는 하나님 우선성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어디에 가치를 부여하고 사는가의 문제입니다. 하나님께 최우선의 그리고 최대의 가치를 두고 사는 것을 말합니다. 셋째는 하나님 집중성입니다. 이것은 어디에 초점을 맞추고 사는가의 문제입니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쏟아부으며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모든 것을 쏟아 부으시고 그래서 자기 아들도 우리를 위하여 내놓으신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께 집중적으로 우리를 드리며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께 최대의 관심을 일관되게 갖고 사는 구체적인 생활태도입니다. 하나님께 최대의 관심을 쏟으며 사는 것이 우리의 가장 큰 행복입니다. 그리고 명예이고 영광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이 사람이듯이 사람의 관심도 하나님이어야 합니다.

정창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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