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를 위한 신학

예배와 신자의 경건

야고보서 1:27

로마서 12:1-2

정창균

잘못 사용되는 영성이라는 말

근래 15-20년 사이에 한국교회에 가장 유행하는 단어 가운데 하나는 “영성”일 것입니다. 영성이란 말이 곳곳에 쓰이고 있습니다. 직장 영성, 공부 영성, 교제 영성, 관계 영성 등 온갖 것에 영성이란 말이 동원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밥상 영성이란 말이 들릴 정도입니다. 그와 함께 “영성훈련” 이라는 말도 여기저기서 들립니다. 영성훈련원이라는 간판을 붙인 기관도 적지 않게 있습니다.

이 영성이란 말, 혹은 영성 훈련이란 말을 들을 때 여러분에게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무엇입니까? 평범한 것이 아니라 비범한 것, 현실적인 것이 아니라 초월적인 것, 보편적인 것이 아니라 신비한 것, 흔한 것과는 다른 어떤 특별한 일을 하는 것, 신비한 체험을 하는 것, 보통 사람들이 모르는 어떤 세계를 접촉하는 것, 보통 신자들은 알 수 없는 어떤 신비한 세계를 아는 자로 사는 것 등을 떠올리지 않나요?

영성훈련원이라는 곳이 여기저기 있습니다. 어떤 영성훈련원이라는 곳에서는 의사가 환자를 진단하듯이 찾아온 사람의 영적 상태를 진단하고, 의사가 환자에게 처방을 해주듯이 특정의 처방을 해주기도 한다고 합니다. 당신은 이러이러한 죄가 있으니까 한 달 동안 일주일에 두 번씩 당신 교회에 가서 청소를 하시오. 당신은 영적으로 지금 이러저러한 문제가 있으니까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성경을 열다섯 번 읽으시오. 심지어 어떤 경우에는 거기 찾아온 사람의 딸의 이름을 적어서 주면 이 딸은 잘못된 남자를 만나고 있으니까 그 사람을 정리하라고까지 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목회할 때 알고 지내던 어떤 권사님이 있었습니다. 예배는 우리 교회에서 드리고 교회 봉사도 하지만 실질적인 신앙생활의 지도와 인도는 영성훈련원이란 곳에 가서 원장에게 받아 옵니다. 매우 잘못된 것입니다. 영성 훈련을 시킨다는 명분으로 무엇을 해결 받으려면 헌금을 얼마 하고 또 성경 어디를 몇 번을 쓰라는 처방을 내린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평범한 것이 아니라 비범한 것, 보편적인 것이 아닌 신비한 어떤 것, 이 세상의 삶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초월적인 어떤 것, 하나님을 직접 만나는 경험 따위를 영성이란 말에 다 담아내고 있습니다. 그런 것을 할 수 있도록 누군가에게 그런 재능을 개발시켜주는 것을 영성훈련이라고 하고 있다면 이것은 매우 잘못된 것입니다.

경건

개혁주의에서는 영성이란 단어를 쓰는 것에 대해서 부정적인 입장을 취합니다. 쓰지 않도록 권합니다. 그러면 제대로 써야 할 단어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그것을 경건이라고 합니다. 영성이란 말 자체가 위험하고 잘못 쓰이고 있으므로 제대로 써야할 말로 바꿔서 쓰는 것입니다. 그런데 경건이란 말에 대해서도 오해가 있습니다. 저 사람은 경건하다, 라고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무엇입니까? 제가 성경을 한 손에 들고 흔들흔들 하면서 교회에 오면 경건합니까, 경건하지 않습니까? 제가 청바지를 입고 강단에 걸터앉아서 설교를 하면 저는 경건할까요, 경건하지 않을까요? 경건하지 않다고 합니다. 목사가 경건치 않게 왜 저래, 라고 할 겁니다. 제가 말을 함부로 하고 비속어를 쓰면 여러분도 금방 저 목사는 경건치 않게 말을 함부로 한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경건하다는 것은 외향적인 어떤 모습이나 차림을 가지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때는 경건하지 않다고 할 것이 아니라 점잔하지 않다고 말해야 합니다. 점잔은가, 점잔하지 않은가는 매너나 외모의 문제이지, 경건의 문제는 아닙니다. 경건은 어떤 외형의 모습이거나 태도거나 매너거나 옷차림이거나 걸음걸이 모습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사람의 외양이나 매너를 가지고 경건하거나 경건하지 않다고 판단을 하곤 합니다. 그것은 잘 못된 것이지요.

그렇다면 경건이란 무엇일까요? 경건이란 그 사람의 종교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종교적인 어떤 특성을 말합니다. 그 사람이 하나님과 맺고 있는 관계가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맺고 있는 관계가 일상 속에서 어떻게 삶으로 실천되고 있는가를 말합니다. 그것을 가리켜 경건이라고 합니다. 참된 경건이란 무엇인가를 극명하게 제시해주는 성경말씀이 있습니다.

야고보서 1:27을 읽어보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약 1:27).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 곧 참된 경건을 일차적으로 무엇과 관련시켜 말씀합니까? “하나님 앞에서”와 관련시킵니다. 경건은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윤리적인 수준이거나 도덕적인 수준이나 인간다움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와 관련을 맺고 있는 어떤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결국 참된 경건은 무엇입니까? 흔히 쓰는 말로 바꿔 말하면 참된 영성이란 무엇입니까? 신비한 세계를 지배하고 초월적인 세계에 들락거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고, 그 관계가 일상의 삶 가운데서 드러나고 일상의 삶으로 확인되는 어떤 것입니다. 그것은 두 가지 방향으로 표현됩니다.

경건의 수직적 차원

첫째는 수직적 차원에서 표현되는 경건의 모습입니다. 본문은 참된 경건은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는 것과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는 것이라고 단정 짓습니다. 여기서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는 것은 결과이고 세속에 물들지 않는 것은 원인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경건이기 위한 가장 중요한 필수적인 핵심 요소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고 사는가의 문제입니다. 이것은 경건의 수직적인 방향입니다. 어떤 사람을 두고 그 사람 참 경건하다고 말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그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은 어떻게 확인이 됩니까? 신비한 세계를 들락거리고 환상을 보는 것이 아닙니다. 세속에 물들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세속에 물들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서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하여 사는 것입니다. 세상을 등지고 살아야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원리대로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현실 세상에 살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과 관계가 바르게 된 것이 아닙니다. 세상 속에서 살면서도 세상의 원리를 따라 살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것이 참된 경건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경건한 삶을 살기 위해서 세상을 떠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더 경건해지기를 소원하여 세상을 등지고 현실 도피적인 삶을 사는 것을 동경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서도 경건을 지금 살고 있는 세상이 악하니까 여기를 버리거나 도망가거나 피하거나 딴 세상으로 가서 안주하는 것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현실을 무시하거나, 내세를 바라보며 이놈의 세상 죄 많은 세상 여기에 무슨 관심을 갖고 사느냐, 주님 나라 사모하며 가야지 하며 내세 지향적으로만 살겠다고 하는 것은 경건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경건한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의 삶을 책임 있게 살지 않는 무책임입니다. 세속에서 살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세속에 물들지 않아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세상에서 살고 있지만 세상의 것은 아닌 것입니다. 물론 세상에서 이렇게 살아간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요. 그러나 절대로 불가능한 일도 아닙니다.

다니엘과 그 친구들은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그들은 바벨론 느부갓네살 왕궁에서 삽니다. 그들이 이방 바벨론에 물들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했을까요? 하루 속히 느부갓네살 왕궁을 빠져나와서 그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다른 곳에 가서 살아야 했을까요? 바벨론의 왕궁 안에 있는 것 자체가 이미 바벨론에 물들어 있는 증거일 수밖에 없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다니엘과 그 친구는 바벨론 왕궁의 한복판에서 하나님의 사람들로 살았습니다. 그것이 세상 속에 살면서 세속에 물들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도 세상이 우리의 주인이 되지 않게 살 수 있습니다. 이것을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가 세속에 물들지 않는 사람으로 사는 것을 보면 우리는 그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사는 사람이라고 알아보게 됩니다. 그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있다면 그는 세속에 물들지 않는 삶을 사는 일에 우선순위를 두고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나의 현실이 바벨론 궁이 되었든지, 우상의 세력이 주도권을 행사하는 사회이든지, 거기에 물들지 않고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상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막8:38). 예수님은 음란하고 죄 많은 세상에서 살 것인가, 음란하고 죄 많은 세상이 아닌 곳에서 살 것인가를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음란하고 죄 많은 이 세상에서 살면서 그 세상에 물들어서 그들처럼 그렇게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그런 세상에서도 예수님과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서 살 것인가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신자의 신분을 잃지 않고 세상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세상에 물들지도 않고 세상을 따라 살지도 않는 것입니다. 그것이 고난을 수반하는 것인데도 그렇게 사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때문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참된 경건이고, 그렇게 사는 사람이 참으로 경건한 사람입니다.

경건의 수평적 차원

둘째는 수평적 차원에서 표현되는 경건의 모습입니다. 그것을 성경은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고아와 과부는 구약시대 때부터 하나님의 백성이 세상에서 실천해야 할 자비와 긍휼을 말할 때 언제나 결정적인 기준으로 등장합니다. 고아는 실제로 부모가 없는 아이를 말하기도 하고, 과부는 실제로 남편이 없는 여인을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상징적인 표현이기도 합니다. 누군가의 도움이 없으면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는 생존을 유지할 능력이 없는 사람, 그 사회에서 가장 약한 사람에 대한 상징적인 표현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내세우면서 “나는 도와주려고 해도 내 주변에는 고아와 과부가 없어. 고아와 과부를 보살피려고 하는데 우리 교회에는 없어.” 이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누군가가 돕지 않으면 스스로 생존할 수 없을 만큼 약한 자,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한 상황에 처한 연약한 사람을 돌아보는 것을 말합니다. 그들을 돌아보는 것은 단순히 도덕적 수준이 높아서이거나 혹은 인간적 동정심이 발동해서가 아닙니다. 수직적으로 하나님과 맺고 있는 관계가 수평적으로 다른 연약한 사람들에 대하여 그렇게 할 수밖에 없도록 행동을 유발한 것입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있는 신자라면 다른 사람에게 이러한 자비와 긍휼을 베푸는 모습으로 그 관계가 증거 되는 법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는 것으로 요약되고 상징화된 그런 삶을 살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자비를 베풀어야 합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왜 그렇게 살아야 할까요? 인격이 수양되고 도덕 수준이 높아서가 아닙니다. 하나님과 맺은 관계의 반영입니다. 그러니까 똑같이 이웃을 돕고 똑같이 구제를 해도 외형은 같지만 그리스도인이 그렇게 하고 교회가 그렇게 할 때와 세상이 그렇게 할 때는 본질이 다릅니다. 근본 동기가 다릅니다. 우리가 신자와 교회로서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며 하나님 앞에서 살 때는 내가 남보다 너그러워서도 아니고, 내가 남보다 여유가 있어서도 아닙니다. 나의 도덕 수준과 인격이 높아서도 아닙니다. 내가 하나님과 맺고 있는 관계가 나로 하여금 그렇게 살게 해서 그런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이것이 참된 경건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외적 모습은 동일할 지라도 하나님과 관계없이 단순히 인간적 동정심이나 선행으로 행하는 것을 놓고 경건하다고 하지는 않습니다. 결국 수직적으로 하나님 앞에서는 세속에 물들지 않고, 수평적으로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자비와 긍휼을 베푸는 것이 참된 경건입니다.

근본적인 문제

오늘날 한국교회는 능멸을 당하고 모욕을 당하고 욕을 먹고 있습니다. 그래서 일부 기관과 지도자들이 나서서 여러 운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교회 세습하지 말자. 재정을 투명하게 운영하자. 헌금을 더 많이 사회로 보내자. 정직하게 살자. 이러한 행동들은 매우 귀합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와 같은 운동들의 근본 의도가 무엇인가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한국교회에 도덕과 윤리 수준이 이지경이 되어 이러한 모욕을 받고 있으니 이제 이런 일들을 해서 도덕 수준과 윤리 수준을 높이자는 것이라면 그것은 위험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도덕 수준이 낮아지고 윤리 수준이 낮아졌으니까 이런 저런 일을 힘써서 하고 이런 저런 비난 받는 일은 하지 않음으로써 우리의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수준을 높이고, 그래서 이 사회로부터 도덕적 신뢰를 회복하자는 것이라면 그것은 잘못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일을 하는 것 자체가 잘못이 아니라, 그런 일을 하는 동기와 목적 설정이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한국교회가 안팎으로부터 이렇게 비난받고 모욕당하는 이런 상황이 된 근본 원인은 도덕 수준이 낮아지고 윤리가 파탄 나서가 아닙니다. 그것은 원인이 아니라 결과입니다.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아서 생긴 문제인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예수를 제대로 믿지 않아서 생긴 문제입니다. 우리가 교회 세습 안하는 것, 교회 재정 투명하게 운영하는 것, 민주적으로 하는 것, 이런 항목들을 구슬을 꿰듯이 하나씩 갖춰서 목걸이를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항목 하나하나가 문제가 아니라 그런 일들이 벌어지게 한 근본적인 문제는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은 것입니다. 예수를 제대로 믿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도덕 재무장 운동으로 갈 일이 아니고 신앙 회복 운동으로 가야합니다. 우리가 신앙을 회복하면, 즉 예수를 제대로 믿으면 도덕 수준은 높아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도덕 수준이 높아지고 윤리 수준이 높아진다고 그것이 자동으로 교회가 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니까 예수 제대로 믿기 운동으로 가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 맺고 그 관계를 근거로 살아가는 운동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참된 경건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도덕적 행위와 신앙을 이원화하여 행위들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신앙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이 원인이고 무엇이 결과인지를 분명히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성경은 여러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행위들을 제시합니다. 그러나 그 행위들이 무엇과 연관을 맺고 제시되는지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출애굽기 1장에 보면 이스라엘 인구가 급격히 불어나니까 바로 왕이 두려워서 이스라엘 인구를 억제시키려고 합니다. 남자가 태어나면 죽이라는 왕명이 히브리 산파들에게 떨어집니다. 왕명을 어기면 죽습니다. 칼날이 목에까지 와 있는 셈입니다. 그런데 히브리 산파들이 아이를 죽이지 않습니다. 그것이 들통 나면 죽는 왕명인데 죽이지 않습니다. 왜 안 죽였습니까? 이 산파들이 도덕 수준이 높아서가 아닙니다. 휴머니스트들이어서가 아닙니다. 생명경외 사상으로 철저하게 무장된 사람들이 서가 아닙니다. 출애굽기 1장을 자세히 읽어보세요. 반복적으로 말하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기 때문에 죽일 수 없었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도덕적 수준을 지키기 위해서 안 죽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 하나님과 맺은 관계대로 살기 위해서 생명의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아이들을 죽이지 않았고, 그래서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었다고 출애굽기는 말합니다.

창세기 39장에 가면 여러분이 잘 아는 말씀이 있습니다. 요셉입니다. 당대 최고의 실권자인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에게 반해서 요셉을 자꾸 유혹합니다. 요셉은 그것을 자꾸 거절합니다. 나중에는 본격적으로 같이 자자고 물고 늘어집니다. 요셉이 옷을 벗어주고 도망가 버렸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요셉은 전혀 성적 감각이 없는 성기능 장애 남자여서 그랬을까요? 혈기 왕성한 청년이었습니다. 그 나라의 제 2인자의 아내를 자기의 수하에 넣을 수 있는 출세의 절호의 기회라는 생각을 못해서 그랬을까요? 도덕심이 뛰어나서 그랬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요셉이 보디발의 아내가 걸어온 유혹을 거부하고 말려들지 않은 힘은 한 가지였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를 범할 수 없다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그 여자의 유혹을 거부하면서 한 말은 그것이었습니다.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범하리이까!” 그는 도덕적으로 뛰어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신앙대로 살려다보니 그렇게 되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참된 경건

우리가 읽은 야고보서가 참된 경건은 하나님 앞에서 세속에 물들지 않고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는 것이라는 말씀이 바로 그 말입니다. 그러므로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단순한 자선 행위가 아닙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이라는 눈에 보이는 표현입니다. 결국 참된 경건은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세상 속에 살고 있지만 그 세상에 물들지 않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지키는 것입니다. 또 참된 경건이란 삶의 현장에서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은 사람임을 드러내면서 사는 삶입니다. 그 핵심을 요약하기를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사실 누군가를 도우려면 돈 있는 사람을 돕든지, 아니면 장차 큰 권력을 얻을 가능성이 있는 사람을 돕든지 하는 것이 지혜일 것입니다. 베푼 것에 대한 대가를 보상받을 수 있을 것이니까요. 고아와 과부는 아무리 도와봤자 그걸로 끝입니다. 고아와 과부는 아무리 도와주어봤자 무엇인가 보상을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은 전혀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을 왜 돕습니까? 그들에게 나중에 보상을 받기 위한 투자가치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연약한 자에게 자비와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과 맺고 있는 관계를 따라서 오늘을 살아가는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하나님과 이런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이란 것의 삶 속에서의 표현인 것입니다. 이것을 성경은 참된 경건이라고 합니다.

의식으로 드리는 예배

신자가 하나님과 맺고 있는 관계를 공동체의 이름으로 공적으로 선언하고 고백하고 확인하는 구체적인 행위가 바로 예배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신자의 경건이 구체적으로 표현되는 현장이 예배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예배는 두 가지로 말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의식으로 드리는 예배요, 둘째는 삶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정한 날, 정한 시간, 그리고 정한 장소에 신앙공동체로 모여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을 의식으로 드리는 예배라고 합니다.

20년 가까이 전부터 예배 갱신이란 말이 대두되고 예배갱신 운동이 진행되어 왔습니다. 물론 예배갱신 운동은 다양한 방식으로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큰 관심은 현대 교회가 직면한 몇 가지 문제에 대한 예배를 통한 반응이라는 데에 맞추어져 있습니다. 예배가 교회가 직면한 문제들을 해결하는데 어떻게 기여할 수 있을 것인가에 초점이 맞추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에 다양한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예배에 대한 생각과 예배를 드리는 형식이나 방식에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예배갱신 운동은 사실상 예배가 교회를 위하여 수행해야 할 어떤 기능에 대한 강조로 진행되어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예배의 문화적 기능에 초점을 맞춘 갱신운동입니다. 이것은 예배를 그 시대의 문화와의 관계라는 관점에서 이해하는 입장입니다. 예배드리는 사람의 문화에 초점을 맞춘 예배갱신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예배가 이 시대의 문화에 적응력과 포용력을 갖추어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예배의 “문화적응” 혹은 “문화포용”이란, 예배가 그 시대의 교회 밖의 문화와 동떨어진 형태로 이루어져서는 안되며, 오히려 그 시대의 문화와 접촉하며 포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이러한 주장은 예배와 그 시대의 문화와의 관계를 중시하는 데서 온 결과입니다. 우리의 예배가 주일날 예배드리러 오는 사람들의 문화를 포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그래서 회중이 교회에서 예배드릴 때 전혀 낯설거나 어색하지 않도록 그들의 문화를 반영한 예배를 드려야한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예배의 선교적 기능에 초점을 맞춘 갱신입니다. 이것은 예배를 불신자 혹은 구도자와의 관계라는 관점에서 이해하는 입장입니다. 그리하여 예배는 그들을 신자의 영역으로 끌어들이는 역할 곧 선교적 기능을 수행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을 말합니다. 불신자들이 우리 예배에 와서 전혀 거리낌이나 어색함이 없이 예배를 드릴 수 있게 함으로써 그들도 소외감을 느끼지 않고 여기에 앉아서 예배를 드리다가 예수를 영접하고 예수 믿을 수 있게 하는 예배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선교적 기능을 수행하는 예배여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입장입니다.

셋째는 예배의 치유적 기능에 초점을 맞춘 갱신입니다. 이것은 예배에 참석하고 있는 회중과의 관계라는 관점에서 예배를 이해하는 입장입니다. 그리하여 예배에 나아온 사람들이 예배를 통하여 치유를 경험하는 예배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예배의 문화적 기능이나 선교적 기능, 혹은 치유적 기능에 초점을 맞춘 예배갱신 운동은 그 강조점에 따라 다양한 방식의 예배 형태를 개발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경배와 찬양”, “열린예배”, “예배 공동체의 역동성이 발휘되는 예배” 혹은 “치유의 예배” 등으로 불리는 다양한 예배 형태로 표출되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놓쳐서는 안되는 매우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이러한 방식의 예배 갱신은 그 목표를 무엇으로 정하든지 예배의 본질에 대한 이해는 모두 같다는 점입니다. 예배를 특정의 효과를 얻기 위한 어떤 기능을 수행하는 방편으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떤 실용적인 효과를 만들어낸다는 점에서는 매우 좋은 착안일지 모르지만, 예배의 본질이 무엇인가, 예배는 수단인가 목적인가라는 점에서 본다면 예배 갱신이 아니라 예배변질로 나아갈 수 있는 매우 위험한 일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예배는 어떤 효과를 얻어내는 방편이기 전에 예배 자체가 하나님과 그의 백성 사이의 관계의 표현이라는 신학적인 본질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위와 같은 예배갱신 운동과 함께 등장하게 된 새로운 형태의 예배는 전통적인 예배와 비교할 때 몇 가지 점에서 급격한 변화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그 변화의 핵심은 크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예배의 본질에 대한 인식의 변화입니다. 예배란 무엇인가를 묻는 본질적인 고민보다는 예배를 통하여 어떤 실용적인 효과가 이루어져야 하는가를 고민함으로써 예배에 대한 인식과 관심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예배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무엇이냐? 우리가 예배를 누구에게 드리는 것이냐? 예배란 것은 그 본질이 무엇이냐는 묻지 않게 된 것입니다. 예배를 드렸는데 어떤 효과가 나타났는가? 치유적 효과가 나타나려면 예배를 어떻게 바꿔야 하는가? 예배는 불신자들을 위한 선교적 기능을 담당해야 하는데 그러면 예배를 어떻게 바꿔야 하는가? 문화적으로 어색함이 없게 현대 문화를 예배가 다 포용하고 그래서 문화적인 배타성이나 어색함이 없게 하려면 예배 스타일을 어떻게 바꿔야 하는가? 이러한 관심이 언제나 예배에 대한 우선적인 관심이 된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서 예배에 대한 본질적이고 신학적인 질문은 뒤로 밀리거나 아예 사라져버리게 된 것입니다.

둘째는 예배의 형태와 진행 방식의 급격한 변화입니다. 의도한 기능적 효과들을 가져올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들에 대한 신중한 분별이나 판단 없이 예배에 들여놓게 되었습니다. 다양한 장르의 음악과 춤, 그리고 드럼을 비롯한 다양한 종류의 악기, 드라마와 간증 등 문화적인 요소가 예배의 중요한 항목으로 도입되고, 음향과 영상 등 효과적인 최신 미디어가 예배에 대거 도입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배의 구성에서 이러한 순서가 차지하는 비중이 급격히 높아졌을 뿐만 아니라, 예배의 진행에서 이러한 요소들이 차지하는 시간적 비중도 급격히 확장되었습니다. 예배를 한 시간에 마쳐야 하니까 점점 말씀을 듣는 시간이 줄어들게 되었습니다. 한국 교회는 너무 설교에 집중되어 있어서 예배를 망치고 있다고 반론하는 사람들도 생겨났습니다. 그리하여 예배는 치밀하게 미리 기획되고 그 기획에 따라 수행(performing) 되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예배는 점점 공연물이 되는 현상을 피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예배는 “드리는 것” 이라기보다는 “관람하는 것”이라는 표현이 더 자연스러운 현상을 초래하게 되었습니다. 회중은 예배를 드리는 자가 아니라 예배를 구경하는 관람객이 되어 버렸습니다. 예배 진행 방식이 급격이 변했습니다. 외국에서 한국교회를 방문하는 건전한 신학적인 입장을 가진 신학자들 가운데 다수가 한국에서 예배를 드리고 가면서 하는 말은 한국교회의 예배는 너무 소란하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예배의 초점이 변한 것입니다. 예배의 초점이 예배를 받는 분으로부터 예배를 드리는 사람에게로 옮겨간 것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이 전제되어 있는 것이잖아요? 그런데 예배에서 하나님은 제외되어 버린 것입니다. 예배가 회중의 감성을 자극하고, 회중을 감정적으로 감동시켜서 회중에게 어떤 경험이 일어나도록 하는 데에 초점이 맞추어졌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다양한 수단과 순서들이 예배에 자연스럽게 동원되었습니다. 사람들의 축제이고 사람들의 잔치이고 사람들의 만족입니다. 너무 부정적으로만 말한다고 저를 욕할 수도 있지만 그러나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예배란 하나님을 향하여 나아가서, 하나님께 드리며, 왕이신 하나님을 듣는 것이라는 점을 놓쳐서는 안됩니다. 예배란 예배하는 자를 위한 것이기 전에 예배의 대상이신 하나님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배의 역할을 아는 것보다 예배의 대상을 아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즉 예배의 실용적 기능은 예배의 본질을 벗어나서 추구되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예배의 본질

그럼 이제 예배의 본질이 무엇인지 말해 보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예배에 대해서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4:20-24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 4:20-24)

예수님이 사마리아 우물가에서 한 여인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마실 물을 달라고 하십니다. 그렇게 해서 유대인인 예수님과 사마리아인인 이 여자 사이에 대화가 시작되었습니다. 어느 정도 말이 오가다가 이 여인이 자기의 현실에서 늘 겪는 예배에 대한 중요한 문제를 들고 나오면서 예수님께 질문을 던집니다. 20절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어디에서 예배하는 것이 맞냐고 예배의 장소에 대한 질문을 던진 것입니다. 거기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이 이렇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요4:21).

예배의 장소에 대해 묻는 질문에 대해 예수님은 예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예배는 누구에게 드리는 것인가 라고 하십니다. 아버지께 예배하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계속하여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 4:22-24).

예배의 장소 문제를 묻는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예배의 대상이 누구이며 참된 예배의 요건이 무엇인가로 대답하시는 모습은 우리에게 예배에 대하여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예배란 어디에서 드릴 것이냐의 문제가 아니라 누구에게 드릴 것이냐가 문제이다. 아버지께 예배드리는 것이 예배다. 그리고 그 아버지께 드리는 예배의 문제가 무엇인가? 그것은 참된 예배인가 하는 것이다. 참된 예배란 무엇인가?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이다. 왜냐하면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이 영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버지께서 찾으시는 예배자도 그러한 사람이다(23절). 예수님은 철저하게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에 초점을 맞추어 예배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배하는 자가 참된 예배자인가, 즉 어떻게 하나님께 예배하는 사람인가에 초점을 맞추어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배가 문화나 불신자나 다른 예배자들과의 관계에서 수행해야 할 실용적 기능이나 현실적 효과에 입각하여 말씀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합니다.

우리는 종종 이러한 말들을 듣거나 혹은 하기도 합니다. “나는 예배 시간에 졸기만 하고, 예배를 드리고 설교를 들어도 아무런 은혜도 안 되고 말씀도 안 들어오고, 졸기만 해서, 오히려 다른 사람까지 시험에 들게 하고, 목사님 뵙기에도 민망하니 차라리 나는 예배 시간에 교회 가지 말고 그냥 집에 있는 것이 낫다. 차라리 집에서 성경을 보는 것이 내 영적 생활에도 더 낫겠으니 나는 교회에 가지 않겠다. 예배에 가면 정말 꼴 보기 싫은 집사가 있는데 그 사람만 보면 화가 나고 증오심을 품게 되어 죄만 짓게 되니 차라니 집에 있는 것이 죄도 안짓고 더 낫다.” 이런 식의 생각들을 해본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어떤 이유로든 이런 식으로 예배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다면 예배를 실용성에 근거하여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배는 내가 그 예배를 드림으로 어떤 효과가 있었는가에 따라서 예배가 가치가 있기도 하고 쓸데없는 것이 되기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는 그 자체로 가치가 있습니다. 제가 목회할 때는 주일 오후 예배를 오후 2시에 드렸습니다. 주일마다 저는 예배시간에 졸고 계신 분들이 너무 고마웠습니다. 그 시간이면 얼마나 졸리겠어요? 그리고 집에서 자면 얼마나 편하겠어요? 그런데 집에서 자지 않고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는 시간에 거기 앉아서 자는 것입니다. 저는 졸리는 분들은 창가에 앉으시라고 했습니다. 창문에 기대고 자면 그나마 좀 편할 것이니 그렇게 하라고 했습니다. 졸지 않고 예배를 드려서 드디어 보람과 가치를 갖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를 드리는 자리에 예배자의 신분으로 있다는 것 자체가 의미요, 복이요, 가치인 것입니다.

예배자의 가장 큰 기쁨과 보람과 복됨은 오늘도 예배 가서 은혜 받았다. 오늘도 예배 가서 회개하고 마음이 너무 통쾌했다. 오늘도 깊은 깨달음을 얻고 새 길을 찾았다. 이런 것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잠시 후에 제가 예배란 무엇인가, 예배에서 우리가 확인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말씀드리면 이것이 보다 분명해질 것입니다. 결론부터 미리 이야기하자면 기독교에서 예배를 드리는 자의 가장 큰 복과 의미와 가치는 예배 공동체가 하나님 앞에 나가는 그 자리에 내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은혜도 못 받고 가서 졸다가 와서 죄만 짓는 것 같은데도 희한하게 그 다음에 또 가서 졸잖아요? 그렇게 가서 예배의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고 있다는 확실한 증거입니다. 예배 공동체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그 자리에서 나는 비록 졸고 내 심사가 매우 복잡하고 하나도 들어오는 말은 없고 찬양도 못 부르고 있지만 어쨌든 하나님 앞에 나가는 예배 공동체 안에 내가 앉아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예삿일이 아닙니다. 거기에 예배의 가치가 있습니다.

은혜를 못 받고 돌아가도 오늘 내가 예배의 자리에 있는 것을 감사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은 실용주의자가 되고 맙니다. 예배를 기능으로만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배를 우리에게 그렇게 주지 않으셨습니다. 예배가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 내가 거기에 있다는 것으로도 놀라운 복이 되는 것입니다.

창세기 4:1-7을 읽어보겠습니다.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창 4:1-7).

가인과 아벨의 제사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서 인류 최초의 살인 사건이 발생합니다. 그것도 형제 살인 사건입니다.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가인은 농사짓는 사람입니다. 아벨은 양을 치는 사람입니다. 제물을 갖고 와서 제사를 드리는데 가인은 곡식으로 제물을 드렸습니다. 아벨은 양을 잡아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인과 그의 제사는 받지 않고 아벨과 그의 제사는 받으셨습니다. 어떻게 해서 이렇게 되었을까요?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요? 이 사건은 무엇을 나타낼까요? 많은 사람들이 그들이 드린 제물에 문제가 있다고 합니다. 가인은 곡식을 드렸고 아벨은 양을 잡아 드렸다. 아벨은 양을 잡아 드렸기 때문에 하나님이 받으셨고 가인은 곡식을 드렸기 때문에 받지 않았다. 왜 가인은 곡식을 드리고 아벨은 양을 드렸을까요? 가진 것이 그것뿐이었으니까요. 농사짓는 사람이 양이 어디 있어요? 양 키우는 사람이 곡식이 어디 있어요? 많은 사람이 자꾸 무엇으로 제물을 드렸는지에 대해 관심을 갖고 제물 때문에 제사를 받기도 하고 받지 않기도 한 것처럼 해석을 하곤 합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이 기록의 뒷부분을 보면 본문은 드린 제물에 대하여는 한 번만 말하고 그 뒤에서 계속 이 제사를 드린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를 말합니다. 특히 가인은 어떤 사람인가를 부각시키는 데 집중하고 있습니다. 표현도 ‘아벨의 제사는 받고’라고 하지 않고 ‘아벨과 그의 제사는 받고’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가인과 그의 제사는 받지 않았다라고 말합니다. 그가 드린 제물 때문에 그를 받은 것이 아니고 그가 하나님이 받으실 만하니까 그가 드린 제물도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예배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예배를 통해서 어떤 효과를 낼 것인가 이전에 예배를 드리는 자가 누구냐가 중요하다는 것이 창세기 첫 제물 사건에서 밝혀진 것입니다. 가인과 아벨이 드린 인류 최초의 예배의 성공과 실패를 결정지은 절대적인 판정 기준은 하나님이 그 예배를 받으셨는가 받지 않으셨는가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합니다(창4:1-7). 그리고 그 예배를 받고, 받지 않으신 하나님의 기준은 그 예배의 기능적 효과를 근거로 한 것이 아니라, 그 예배를 드린 예배자가 어떠한 사람인가에 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합니다.

잘 아시는 대로 이사야 1:11에 가시면 놀라운 말씀을 하나님이 하십니다. 이 선지서가 1장 초두를 어떻게 시작하는지 아십니까?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내 말을 들어보라. 하나님이 하늘을 향하여 재판을 걸고 땅을 향하여 고소장을 냅니다(2절). 누구를 놓고 그렇게 하십니까? 소도 그 임자를 알고 짐승도 그 주인을 알건만 내 백성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자기 백성은 소만도 못하고 짐승만도 못하다는 것입니다(3절). 이것을 누가 알겠느냐 하고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들으라고 하시면서 하늘과 땅을 향하여 고소장을 내십니다. 무엇 때문에 그러십니까? 아래 11절 이하를 보면 이렇게 말하십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사 1:11-14).

이 말씀을 쉽게 풀어보면 이런 말입니다. 주일 오전예배, 저녁예배, 수요예배, 금요기도회, 특별 기도회, 특별새벽기도회, 온갖 예배모임을 빠지지 않고 다 지키고 십일조, 감사헌금, 건축헌금, 특별헌금, 절기헌금, 부활절 감사헌금, 추수 감사헌금, 생일 감사헌금 등 온갖 예물을 조목조목 다 드리지만 하나님이 자신과는 아무 상관없다는 것입니다. 절기를 지키고 헌금을 드리는 것이 나쁘거나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지키는 절기와 헌금과 헌신들이 정말 가치가 있으려면 다른 조건이 갖춰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네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볼 때 어떤 사람이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너는 나와 아무런 상관없다.” 그러시는 사람이라면 그가 내놓은 온갖 열심이 모두 헛것이라는 것입니다. 예배드리는 그 사람이 누구인가? 그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예배에서는 예배자가 하나님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가 근본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다른 관점에서 본다면, 그러므로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에 예배자로 앉아 있는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로 이 현장에 있다는 사실 자체가 무엇보다도 감격이고 감사고 보람이고 가치입니다. 예배에서 무엇을 얻었는가는 다른 문제인 것입니다.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 그리고 그분께 드리는 예배 자체가 목적인 것입니다.

기독교 예배의 독특성

예배를 받을 자의 예배자 선택

기독교 예배의 첫째가는 특징은 예배 받을 자가 예배 할 자를 선택한다는 것입니다. 누가 예배를 드릴 수 있는가를 예배 받을 자가 정하는 것입니다. 모든 이방 종교들은 예배하는 자가 어떤 신을 예배할 것인가를 정합니다. 오늘은 산신령에게 갈까 아니면 용왕신에게 갈까를 선택합니다. 그리고 자기가 가고 싶은 곳에 갑니다. 모든 종교가 그렇습니다. 기독교만 예배를 받을 하나님이 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는 자를 정하십니다. 하나님이 “너는 나에게 예배해도 돼. 너는 나한테 나와서 예배해도 괜찮아. 너는 예배할 수 있어.” 이렇게 허락하고 선택하고 인정해주시는 사람만 하나님 앞에 예배자로 나아올 수 있습니다. 이것이 기독교 예배의 가장 두드러진 독특성입니다. 그러니까 예배자로 나와 있는 것 자체가 엄청난 특권이고 은혜입니다. 가서 졸았는가? 예배에서 은혜를 받았는가? 찬송에 은혜가 되었는가 안 되었는가? 이런 것 따지기 전에 하나님이 “너는 나한테 예배해도 돼. 나는 네가 하는 예배를 받겠다. 너는 얼마든지 내 앞에 예배자로 나올 수 있다.” 이렇게 선택을 받고 허락을 받은 사람이라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은혜입니다.

예배를 받을 하나님이 예배할 자를 택하여 나오게 하셨다는 사실은 예배할 자들에게 매우 중요한 요구를 그 안에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하나님을 예배하여야 한다는 사실 입니다. 예배하는 자들을 위해서, 즉 예배하는 자들의 필요를 채워주기 위해서 기획되는 것이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제사장 나납과 아비후가 다른 불을 제단에 가져왔다가 불에 삼켜죽음을 당한 사건(레 10:1-3)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예배를 드리지 않는 것에 하나님이 어떻게 노하시는가를 잘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는 문화의 문제나 실용적 기능성의 문제가 아니라, 신학과 신앙의 문제입니다.

인격적 관계

기독교 예배의 두 번째 독특한 성격은 예배를 받는 자와 예배하는 자가 인격적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단순히 하나의 객체나 대상이 아닙니다.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은 그에게 예배하는 자와 깊은 인격적 관계를 지속적으로 삶의 모든 영역에 걸쳐 맺고 있습니다. 대다수의 이방종교에서 예배를 받는 신과 예배하는 자 사이의 관계는 주고받는 거래관계입니다. 사람은 그 신이 필요한 것을 제공함으로서 신을 달래고, 신은 사람이 할 수 없는 초인적 일들을 수행해준다는 것이 이방종교 예배의 본질입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입니다. “나는 용왕님에게 제사를 드렸으니까 용왕님의 뜻에 따라 살아야해.” 이런 사람 봤어요? “나는 산신령에게 제사를 드렸는데 그 신은 돼지 머리를 좋아한데. 그래서 오천 원 더 비싼 웃는 얼굴 돼지 머리로 다섯 개나 드렸어. 그러니까 앞으로 그 신의 마음에 들게 인생을 살아야해.”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하나님과 하나님을 예배하는 회중과의 관계는 그러한 거래 관계가 아닙니다. 인격적인 관계입니다. 왕과 백성의 관계이고, 구원자와 구원받은 자의 관계이고, 부모와 자녀의 관계이기도 합니다. 서로를 사모하기도 하고, 서로에 대하여 서운해하기도 하고, 마음 아파하기도 합니다. 무엇을 얻어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냥 사랑하기 때문에 목숨을 내놓는 헌신을 하기도 하는 사이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위하여 아들을 죽음에 내어놓을 수도 있고, 그들은 하나님의 뜻의 성취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자기들의 가장 중요한 것을 아끼지 않고 드릴 수도 있는 관계입니다. 서로를 보고 싶어 하고 때로는 서로 속상해 하고 때로는 자기를 희생해서 그에게 무엇인가 주고 싶어 합니다. 어떤 때는 하나님 때문에 속상해서 웁니다. 어떤 때는 성령님이 우리 때문에 속상해서 근심합니다. 이런 인격적인 관계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예배 시간에 나와서 하나님께 줄 것 주고, 받을 것 받아 가는 그런 거래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 영역의 포괄성

기독교 예배의 세 번째 독특성은 예배의 영역이 포괄적이라는 사실입니다. 예배자의 전인격에 관련을 맺는다는 점에서 포괄적입니다. 제사를 드리는 자가 어떤 성격인가, 어떤 행동을 했는가와 아무런 상관없이 그가 제물만 제대로 드리면 되는 이방종교의 예배와는 다릅니다.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시는 것은 그러므로 예배자입니다. 사람입니다.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인류 최초의 살인사건의 단초가 되었던 가인과 아벨의 제사 문제의 본질은 그들이 드린 제물이 아니라, 그 제물을 드린 그 사람들의 문제였습니다. 이사야 1장에서 본 것처럼,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하늘과 땅을 향하여 마치 고소하듯이 탄식하시고, 그 백성들이 당신 앞에 제사하러 나오는 것을 분노하며 거부하신 것도 그 사람들을 중요하게 여기시기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예배자의 생활과 삶의 모든 영역과 관련을 맺고 있다는 점에서 기독교 예배는 포괄적입니다. 기독교의 예배는 단순히 예배의식에 국한되어 있지 않습니다. 기독교의 예배는 예배하는 자가 특정한 시간에 특정한 장소에서 특정의 의식을 갖추어 드리는 것만이 아니라, 삶의 모든 영역을 포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예배는 예식으로 드리는 예배와 삶으로 드리는 예배, 혹은 모여서 드리는 예배와 흩어져서 드리는 예배, 교회 안에서 드리는 예배와 교회 밖 생활의 현장에서 드리는 예배로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곧 기독교인에게는 삶의 모든 영역을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라는 관점에서 받아들여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신자는 정한 시간에 정한 장소에 정한 예물을 가지고 와서 일을 끝낸 다음 자신의 위치로 돌아가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사실은 나중에 삶으로 드리는 예배라는 항목으로 다시 말씀을 드릴 것입니다.

예배를 통하여 확인하는 내용들

우리가 예배를 드리는 동안 실제적으로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은 무엇인가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예배를 드리면서 무엇을 확인하게 되는 것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왕이신 하나님 앞에 나아감

예배를 드리면서 우리가 확인하는 첫 번째 내용은 우리가 왕이신 하나님 앞에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예배에서 예배자는 존엄하시고, 거룩하시고 엄위하신 왕 앞에 나아가는 백성입니다. 여기에 예배의 존엄과 두려움과 진지함의 근거가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특히 보수주의 입장의 교회에서 유지해온 예배자들의 진지한 외모와 자세, 그리고 엄숙한 분위기의 예배 전통은 이러한 점을 강조하는 데서 온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배는 공연 관람하러 오는 것이 아닙니다. 오랫동안 못 보는 친구니까 주일날 교회에 가서라도 보려고 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일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예배에 나오는 주요 목적은 아닙니다. 예배를 드리러 올 때는 나를 부르신 나의 존귀하신 왕 앞에 나간다는 생각을 갖고 예배실에 들어와야 합니다. 예배를 시작할 때 우리는 이제 왕 앞에 나간다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우리를 부르시는 왕입니다. 우리는 예배에 와서 그것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왕 앞에 나아가는 것이 가능하게 된 것은 그 왕이 우리를 그렇게 나아올 수 있는 자로 선택하시고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나는 네 하나님이 되고 너는 내 백성이 되리라”는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언약행위로 말미암은 하나님과 그의 백성 사이의 언약 관계와 자신이 스스로 화목제물이 되셔서 하나님과 그의 백성 사이에 막힌 담을 허물어버리신 그리스도의 은혜로우신 구속사역에 그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그 외에 다른 이들은 예배자가 될 길이 없습니다. 여기에 우리가 예배자로 하나님 앞에 나아간다는 사실의 영광스러움과 감격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특정의 예배에서 은혜가 있었는지 없었는지, 예배의 분위기가 감동적이었는 아니었는지, 그 예배를 통하여 무엇을 얻었는가와 상관없이, 우리 자신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의 현장에 예배자로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언제나 감격과 감사와 그리고 자신에 대한 당당함을 누릴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예배자로 거기 있다는 것은 자신이 왕이신 하나님에 의하여 예배자로 불림을 받았다는 생생한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께서 화목제물이 되어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성취하신 하나님과 죄인 된 그 백성 사이에 회복된 화목에 대한 현장에서의 생생한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예배는 예배하는 자에게 의무나 부담이 아니라 그 자체가 기쁨과 감격이며 감사입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역사의 확인

예배가 갖는 두 번째 중요한 의미는 우리는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이 이루신 역사를 확인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자로서 행하신 창조의 역사와 섭리의 역사, 구원자로서 행하신 구원의 역사, 그리고 성취와 완성을 확인하는 종말의 역사를 확인합니다. 찬양을 통해서, 기도를 통해서, 예배 진행 순서를 통해서, 또는 설교를 통해서, 우리는 우리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하나님이 어떤 일을 행하셨는지를 확인합니다.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할 때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전능하신 창조주이신데 그 외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나를 위해서 죽으셨다, 하나님이 거룩한 교회를 만드셨다고 고백합니다. 어느 때는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일을 이루셨는가를 간적접으로 혹은 직접적으로 확인합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거룩하심과 자비로우심을 확인하며, 영원한 안식에 대한 대망을 확인하게 됩니다. 즉 하나님은 누구이신가, 그는 어떤 일을 행하셨는가, 어떤 일을 행하실 것인가를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배에서는 역사를 계획하시고 진행하시는 아버지 하나님과 그 역사를 성취하시는 성자 예수님, 그리고 이러한 사실들이 믿어지고 고백되고 누려지도록 역사하시며 적용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것이고, 예배자들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방종교의 예배에서는 예배하는 신이 누구인지, 어떤 성품을 가졌는지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 신이 나의 문제를 해결해줄 능력이 있는지, 내가 무엇으로 그 신을 달래고 만족시키면 나의 요구를 들어줄 것인지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을 뿐입니다. 나의 능력을 초월하는 그 신의 능력을 그 신이 필요로 하는 어떤 방편이나 대가를 지불함으로써 사고자 하는 거래가 있을 뿐입니다. 이방종교의 예배는 예배하는 사람의 욕구충족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고, 기독교의 예배는 예배를 받으시는 분의 영광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나를 위한 역사임의 확인

예배 가운데서 우리가 확인하는 세 번째 중요한 내용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그 역사들이 결국 나를 위한 역사이고, 내가 그 역사에 포함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즉, 나 자신이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 하나님의 언약을 소유한 자라는 자기 정체성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셨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로 하여금 십자가에 죽게 하셨다. 그는 장사된 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 그는 부활했고 승천했다. 그는 다시 오신다. 교회는 거룩한 것이다. 이런 사실들을 설교 메시지에서, 우리가 부르는 찬송에서, 우리를 대표한 기도에서 이모저모로 확인하게 됩니다. 그리고 예배에 임재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역사와 특별히 성령님의 역사로 그러한 사실들이 믿어지고 경험되고 고백되는 복을 누리게 됩니다. 그 역사가 나를 위해서 이뤄진 역사라는 것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나와의 관계성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나도 그 역사에 속한 자란 것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 역사가 나의 역사임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2천 년 전 3천 년 전에 일어났던 우리와 전혀 상관없는 역사에 대해 배우는 것이 아닙니다. 나도 그 역사에 포함된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이로부터 감격과 감동, 그리고 위로와 격려를 누리게 됩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나와 개인적인 관계를 맺는 나의 하나님이심을 확인하게 되고, 또 그 사실을 감동적으로 고백하게 됩니다.

미래에 대한 소망에 찬 확신

네 번째는 미래 역사에 대한 확인입니다. 하나님이 왕이신데 그 하나님 앞에 나왔다. 하나님이 이런 역사를 하셨다. 그런데 나도 그 역사에 포함되었다. 내 역사이기도 하다. 그것을 보는 순간 미래에 대한 눈이 열리는 것입니다. 나는 결국 승리자로 하나님 앞에 선다. 나도 종국에는 부활한다. 아 나는 하나님의 영광이 약속된 사람이구나. 그러니까 나는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는구나. 이렇게 살지 말고 저렇게 살아야 되는 사람이구나. 아 나는 지금 고난을 당하고 있지만 이 고난이 끝이 아니구나. 아 내가 지금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데 이것은 재수 없어서 생긴 일이 아니구나. 여기에도 하나님의 뜻이 있으셔서 무엇인가 이뤄지겠구나. 그렇게 미래에 대한 소망에 찬 확신이 생기는 것입니다. 구속사적인 전망과 종말론적 소망에서 미래에 대한 확고부동한 확신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공동체라는 사실의 확인

다섯 번째 확인하는 사실이 있습니다. 나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그런 사람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예배 공동체에 나와서 우리가 모두 한 은혜를 받은 자요, 한 역사에 참여한 자요, 영원히 한 역사에 참여할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은혜입니다. 아, 나만이 아니네. 우리 모두가 그런 존재들이네! 특별히 성찬식에서 우리가 결정적으로 확인하는 것도 바로 이 사실입니다. 성찬에 참여하는 우리 모두가 함께 이 속죄의 은혜에 참여한 자요, 마침내 예수께서 다시 오시면 예수님이 펼치실 그 식탁에 함께 동참하게 될 사람들이요, 우리는 그 확신과 그 소망을 가지고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은 큰 은혜입니다. 우리는 예배에서, 특별히 성찬식에서 그것을 공동체적으로 확인하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예배 공동체가 예배를 드릴 때마다 확인해야 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런 사람들이라는 것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축제로서의 예배

우리가 예배에서 확인하는 빼놓을 수 없는 여섯 번째 사실은 예배의 축제적인 성격입니다. 앞에서 본 것처럼 예배에서 우리는 왕의 선택을 받고 왕 앞에 나아가는 자기 자신과 하나님께서 이루신 역사의 객관적 확인은 물론 그 역사가 결국 나 자신의 역사라는 사실의 확인, 그 사실에 근거한 미래에 대한 소망에 찬 종말론적 확신, 그리고 이 공동체는 함께 이 은혜와 특권을 누리게 된 사람들이라는 사실의 확인은 필연적으로 개인적인 기쁨은 물론 공동체적 기쁨과 즐거움을 불러일으키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예배가 갖는 축제적인 성격입니다. 물론 축제적인 성격이 언제나 요란하고 특별한 방식의 어떤 행사나 예배의 고정된 순서로 표출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예배의 본질을 제대로 이해하며 드리는 예배에는 언제나 깊은 감격과 기쁨과 감사와 공동체적 사랑의 축제 분위기가 있음을 감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느헤미야 8장을 보면 광장에 강단을 높이 쌓아놓고 백성들이 모두 모여 있습니다. 에스라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고 그 강단에 섭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송축합니다. 그러자 백성들이 손을 들고 아멘 아멘 응답하고 얼굴을 땅에 대고 하나님을 경배합니다. 에스라가 말씀을 선포하고 곁에 있던 자들이 말씀을 가르치니까 백성이 다 웁니다. 이 때 총독 느헤미야와 에스라, 그리고 레위인들이 백성에게 말합니다. “울지 말라. 슬퍼하지 말라. 오늘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성일이다!” 그리고 느헤미야가 말합니다. “살진 것을 먹고, 단 것을 마시라. 예비치 못한 자에게는 너희가 나누어 주라. 이 날은 우리 주의 성일이니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이어서 레위 사람들도 백성에게 같은 말을 합니다. 그래서 공동체적인 축제가 됩니다. 이 광장 모임은 이렇게 끝납니다. “모든 백성이 곧 가서 먹고 마시며 나누어 주고 크게 즐거워하였다! 이는 그 읽어 들린 말을 밝히 알았기 때문이다.” 예배의 본질을 이해하고 나면 저절로 예배는 축제가 됩니다. 굳이 축제로 만들기 위하여 인위적인 어떤 행사들이나 이벤트를 덧붙이지 않아도 예배를 제대로 드리면 축제가 됩니다. 그것은 예배가 축제적인 본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의식으로 드리는 예배가 많은 부분에서 왜곡되어 있고 변질되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예배를 이렇게 길게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예배가 얼마나 중요합니까? 의식으로 드리는 예배에서 우리는 참된 경건을 필수적으로 확인해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에 물들지 않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사는 사람들이다. 이것을 확인하고 선포하고 또 바로잡기도 하는 것입니다.

삶으로 드리는 예배

성경은 예배를 단순히 하나의 신앙공동체가 정한 시간에 정한 장소에 모여서 함께 드리는 의식으로만 이해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합니다. 성경은 신앙 공동체가 흩어져서 살아가는 현장에서의 삶 자체를 가리켜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12:1-2을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1-2).

1절에서 보는 바와 같이 사도 바울은 지금 영적 예배에 대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고 말씀합니다. 우리의 몸을 제물 삼아서 제사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이것이 우리가 드려야할 영적 예배라고 말합니다. 우리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는 말이 무슨 뜻일까요? 우리가 모두 자살하여 죽어서 몸을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라는 말일까요? 그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 몸을 제물로 드릴 수 있을까요? 사도 바울은 우리 몸을 산 제물로 드리는 구체적인 내용이 무엇인가를 2절에서 말씀합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사도는 이것이 우리의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방법이라고 말하는 셈입니다. 이것은 어떤 종교적 의식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일상생활에 대한 말씀입니다. 우리의 일상의 삶을 어떠한 원리와 가치 기준을 갖고 살아갈 것인가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것이 우리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구체적인 내용이고,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가 드릴 영적 예배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말하는 예배는 우리가 주일에 교회에 모여서 찬송 부르고 기도하고 설교 들으면서 하나님께 드리는 그런 의식으로 드리는 예배와는 전혀 다른 방식의 다른 예배를 말하는 것이 분명하지 않습니까? 바로 우리의 일상의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모여서 의식으로 드리는 예배를 마치고 흩어져서 각각의 삶의 현장에서 살아가는 삶을 두고 예배라고 한 것입니다. 그 일상의 삶을 이 세대를 본받지 않고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따라 사는 것을 우리의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그것이 바로 우리가 드릴 영적 예배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3절부터는 긴 이야기가 나오는데 모두가 우리가 하루하루의 생활 가운데서 직면하는 다양한 일이나 행위들에 대한 지침입니다.

결국 예배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선하시고 거룩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따라 하루하루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것을 사도 바울은 몸으로 드리는 예배라고 말했고 그것을 가리켜서 영적인 예배라고 합니다. 야고보서에 있는 말씀을 가지고 말한다면, 이 세대에 물들지 않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지키는 것입니다. 이 모든 시대 속에서 물들지 아니한 사람으로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결국 그리스도인에게는 일상의 삶이 예배 행위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사는 삶을 도덕 수준의 양심이나 사회적 체면이라는 안목으로 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너희는 그 수준으로 살 사람이 아니란 것입니다. 똑같이 돕고 똑같이 용서하고 똑같이 유혹에 안 빠지는 일을 하지만 너희들이 그 일을 할 때는 의미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차원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영적인 예배의 차원이란 것입니다. 이 말을 뒤집으면 신자는 이 땅에서 하루하루의 삶을, 이 세속에서의 삶을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자의 자세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는 일상에서의 모든 행동이 예배적인 삶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청교도들이 그 삶에 가장 가깝게 살았다고 생각합니다. 청교도들이 살았던 유명한 삶의 모토가 ‘코람데오’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배적 삶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경건은 무엇입니까? 참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참된 예배자가 참된 경건의 소유자입니다. 신비한 일을 하고 아무도 모르는 비밀을 알아내고 초월적인 세계에 나가서 무엇을 하고 신비한 체험을 하는 것이 경건이 아닙니다. 참된 경건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지 나는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고 사는 사람인가를 알고 그 정체성을 바르게 하여 세상이 뒤집어진다 해도 그 세상 속에서 예배적인 삶을 사는 것입니다. 물론 “삶으로 드리는 예배”라는 말이 생활현장에서도 수시로 시간을 내어 예배시간을 가져야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삶 자체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께 삶을 드리는 원리와 자세로 일상의 삶을 살아야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시편29:2절은 “여호와께 그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며 거룩한 옷을 입고 여호와께 예배할지어다”라고 말씀합니다. 여호와께 예배하기 위하여 입어야 하는 거룩한 옷이 상징적으로 의미하는 것은 바로 예배자의 거룩한 삶입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 편에 서있는 사람이 살아야 될 삶을 사는 것입니다. 쉬울까요? 쉽지 않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성공할까요? 매번 실패합니다. 우리는 실패하지 않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인 것이 아니라, 실패해도 그 길을 갈 여유와 은혜의 약속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입니다.

이렇게 놓고 보면, 예배와 신자의 경건은 뗄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참된 경건한 사람이라는 것이 어떻게 드러나게 될까요? 의식으로 드리는 예배와 삶으로 드리는 예배, 모여서 드리는 예배와 흩어져서 드리는 예배, 공동체로 드리는 예배와 혼자서 드리는 예배, 이 예배를 통해서 우리는 경건한 사람이라는 사실이 표현되고 입증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신비한 것, 초월적인 것을 경험하지 못했다고 쫄지 마십시오. 기죽지 마십시오. 누가 영성훈련원에 가면 개인적인 비밀을 척척 맞추거나 무엇인가 비범한 일을 한다고 해도 그곳에 가지 마십시오. 쓸데없습니다. 그것을 영성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성경이 말하고 기독교가 추구하는 진정한 영성이 아닙니다. 참된 경건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맺고 세속에 물들지 않는 것입니다. 자신은 하나님과 그런 관계를 맺고 사는 사람이라는 것을 드러내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것은 두 가지 방법으로 가능합니다. 첫째는 신앙공동체에 속하여 의식으로 드리는 예배를 열심히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일상의 삶을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자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의식으로 드리는 공동체의 예배와 일상의 생활을 예배자의 마음으로 살아가려고 애쓰는 것이 예배적 삶이고, 그것이 성경이 말하고 우리가 붙들어야할 참된 경건입니다.

나가는 말

결국 성경은 의식 혹은 예전으로 드리는 예배(요4:23-24)와 삶으로 드리는 예배(로마서12:1-2)를 우리가 하나님께 드려야 할 예배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칼빈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예배”를 매우 강조합니다. 그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수단이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수단이 바로 예배입니다. 그리고 칼빈이 제시하는 예배의 종류는 “교회 안에서 드리는 예배”와 “생활의 현장에서 자기의 삶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그러므로 예배자에게는 교회 안에서 예배시간에 드리는 예배와 흩어져서 살아가는 삶의 현장이 독립된 별개의 것이 아닙니다.(이사야 1:11-17). 주일날의 교회 안과 주간의 교회 밖이 똑 같이 예배의 현장입니다. 동시에 이 두 예배는 필연적으로 깊은 관련을 맺고 있습니다. 의식으로 드리는 예배의 성패는 삶으로 드리는 예배와 깊이 관련되어 있습니다. 삶으로 드리는 예배에서 의식으로 드리는 예배로 돌아갈 근거와 이유를 획득하기 때문입니다. 그런가하면 삶으로 드리는 예배의 성패는 의식으로 드리는 예배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습니다. 의식으로 드리는 예배에서 삶으로 드리는 예배를 성공할 힘과 근거와 지침을 얻기 때문입니다.

만약 의식으로 드리는 예배에만 집착하고 삶으로 드리는 예배를 소홀히 한다면 결국 의식으로 드리는 예배에도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그 의식을 예배로 인정하시 않으실 뿐 아니라, 오히려 노하심으로 거절하시기 때문입니다. 이사야서 1:11-17의 말씀은 삶으로 드리는 예배에 실패하면서 의식으로 드리는 예배로 모든 것을 떼우고 스스로 만족에 빠지는 신자들의 행태가 얼마나 하나님께 무서운 책망을 받을 만한 것인가를 생생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삶으로 드리는 예배에는 관심이 없으면서 때를 따라 열심히 드리는 예배의식을 하나님은 거부할 뿐 아니라 그것을 예배로 인정도 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일상에서 예배적 삶을 강조하면서 의식으로 드리는 공동체의 예배를 소홀히 하면 예배적 삶을 살아갈 예배자로서의 정체성과 실제적인 지침을 얻는데 치명적인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삶으로 드리는 예배를 성공적으로 살아내기 위해서는 매주일 예배공동체로서 드리는 정당한 예배에 반드시 참여하는 예배자로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설교가 성경말씀을 근거로 하여 도전과 지침과 격려와 설득과 경고 들을 제대로 알려주어야 합니다. 삶으로 드리는 예배를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도록 회중을 이끄는 것이 설교가 지향하고 있는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참된 경건은 참된 예배생활을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참된 예배생활을 통하여 신자의 참된 경건을 드러내고, 그것을 누리며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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