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강해

빌레몬서 – 큰 그림보기(3/9)

2. 죄수인 것이 자랑거리가 되는 사람

사도의 특이한 자기소개와 의도

편지 첫머리에서 바울은 편지를 보내는 자기를 소개하고 있다. 그런데 빌레몬서 첫머리에서 자기를 소개하는 방식이 예사롭지가 않다. 그는 자기를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바울”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사실 바울은 여러 서신들 가운데서 유독 여기서만 자신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거의 대부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고전, 고후, 엡, 골, 딤전, 딤후)라고 자신을 소개한다. 그 외에 ”하나님의 종이요, 예수그리스도의 사도“(디도서), 그리스도 예수의 종(빌립보서), 혹은 ”예수 그리스도의 종“(로마서)이라고 하며, 갈라디아서에서는 그냥 ”사도“라고 하는가 하면, 데살로니가 전서와 후서에서는 아무런 수식 없이 그냥 ”바울“이라고만 밝히고 있다.

유독 여기서만 자신을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갇힌 자”라고 밝히고 있다는 점을 착안하고 본문 전체를 다시 읽다보면, 바울은 이 편지에서 자신을 밝히는 대목에서는 예외 없이 이 표현(갇힌 자 혹은 갇힌 상태에 있는 모습)으로 자기를 밝히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1, 9, 10, 13, 23). “갇힌 자”라는 말은 감옥에 갇혀 있는 죄수라는 의미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아무리 그것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굳이 자신은 죄수라는 것을 드러내어 그것도 여러 번씩 반복하여 말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바울은 그렇게 하고 있다. 바울은 그렇게 할 때 어떤 심정, 어떤 기분인가? 자신을 감옥에 갇혀 있는 자라고 밝히고 있는 맥락을 살펴보면, 그것은 수치심도 아니고, 억울함에서 나오는 원망스러움은 더더욱 아니다. 오히려 자랑스러움으로 그렇게 자신을 밝히고 있다는 것을 감지할 수 있다.

죄수인 것이 자랑이 되는 이유

이러한 착안은 자연스럽게 다음 단계의 질문을 유도한다. 바울은 왜 자신이 죄수의 신분인 것을 자랑스럽게 밝히는 것인가? 그것은 그 죄수가 된 원인과 목적 때문이다. 곧 “그리스도 예수 때문에”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인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갇힌 자”라고 분명히 밝히는 것이다. 바울은 자신이 부끄러워하지 않고 자랑스러워 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그런 자신을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당당히 말하는 사람이다. 디모데후서에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주를 위하여 갇힌 자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단호하게 말한다(딤후 1:8). 주를 위하여 갇힌 자가 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 자랑스러워하고 또 기꺼이 그 길을 갈만한 일이라는 것이 사도의 확신이요 삶의 철학인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는 디모데에게 주를 위하여 갇힌 자신을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하면서 바로 덧붙이기를 “너는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권면한다. 우리가 처하고 있는 현실은 그것이 사람들에게 자랑할 만한 조건이 되는 것인가에 의하여 자랑거리나 수치거리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분명한 가치관의 표명이다. 무엇 때문에 그러한 처지에 있는가 하는 것이 그 처지가 자랑스러운가 수치스러운가를 결정하는 기준이요 근거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처해 있는 현실이 가난하면 부끄럽고 부유하면 자랑스럽고, 높은 자리에 있고, 큰 교회 목회하고 있고, 일이 형통하게 풀리고 있고, 신자나 불신자나 모두 부러워할 만큼 평탄한 처지이면 자랑스러워할만 하고 그 반대는 부끄러워할 일이 아닌 것이다. 지금 처지가 어떠한가에 의해서가 아니라, 왜 그러한 처지에 있는가에 의해서 자랑과 수치를 결정하며 사는 것이 신자들이다. 그 결정적인 기준이 “그리스도 예수 때문에!”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이다. 그러므로 신자는 지금 처하여 있는 현실의 상태가 아니라, 그러한 현실에 처한 원인이 무엇이고 이유가 무엇인가를 주목해야 한다. 그 원인과 이유가 “그리스도 예수”라면 그것은 감옥 안의 죄수의 현실이라 하여도 자랑스러워할 만하다. 이것은 신자들만이 그렇게 살 수 있는 독특한 모습이요, 특권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문의 사도 바울을 “죄수인 것이 자랑거리가 되는 사람”이라는 주제로 드러내어 어떻게 이런 모순적인 일이 가능하게 되는 것인가,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갇힘”의 구체적인 의미 혹은 내용은 무엇인가? 어떻게 그것을 오히려 자랑스러워 할 수 있는가? 그것이 오늘날 우리 신자들에게는 어떤 방식으로 혹은 어떤 모습으로 구체화 될 수 있는가? 등의 질문을 던지며 메시지를 포착해나가는 방식으로 본문을 접근할 수 있다. 신앙 핍박이 전혀 없는 오늘 날 우리에게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갇힘”에 해당하는 구체적인 내용들로는 어떠한 것들이 있는가를 적용적 차원에서 묵상해볼 수 있을 것이다.

같은 맥락의 다른 경우들

죄수이면서도 그것이 오히려 자랑이 되는 사람이라는 관점을 부각시키면서, 고린도후서 12:5-10절에서 자기의 약한 것들을 자랑한다고 선언하는 모습을 연결하면서 이러한 주제를 다룰 수 있을 것이다. 어떻게 사단이 준 것이라고 밖에는 표현할 길이 없을 만큼 지독하고 지긋지긋한 자신의 병, 일상생활을 하는 데도 장애물이 되고, 사역에도 거침이 되는 것, 그래서 하나님께 그것을 제거해주시라고 세 번씩 기도했던 그 문제를 몸에 가지고 평생 살아야 하는데 오히려 자랑하며 살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이 좋아졌단 말이 아니다. 그 병이 자랑스러워졌다는 말이 아니다. 그렇게 지독하고 지긋지긋한 것이 이제는 편안하고 고통이 없고 재미있어졌다는 말이 아니다. 그 병이 이제는 무슨 신비한 능력을 자기에게 주고 있다는 말이 아니다. 그 병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이 나에게서 나타난다는 사실, 그것이 나에게는 족한 하나님의 은혜의 증거가 된다는 사실 때문이다. 어떻게 그것이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근거가 되며 그것이 어떻게 나에게는 풍족하고 만족한 하나님의 은혜가 된다는 말인가? 은혜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능력이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사도는 드디어 이 깨달음에 이른 것이다. 그 깊은 깨달음의 안목으로 그 지독한 가시, 그 지긋지긋한 약점을 바라보니 이제야 알겠는 것이다. 아, 이것이 나의 자랑거리다. 아, 이것이 내게 임한 하나님의 은혜다! 라고 당당하고 떳떳하게 선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 깨달음이 무엇인가, 그 안목이 무엇인가? 그 문제, 그 고통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갖고 있는 역할과 의미에 대한 깨달음이다. 그리고 그 문제를 이제는 그것이 나에게 어떤 아픔을 주는가, 어떤 거침이 되는가의 안목이 아니라, 그래서 하나님이 어떻게 되고, 나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어떤 위치에 들어가고, 어떤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인가의 안목으로 나의 현실을 해석하며 살게 된 것이다.

고린도후서 11:16-30절에서 바울이 펼쳐내는 자랑의 논리에서도 우리는 이러한 원리와 논리를 확인할 수 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자랑하는 것들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다. 그리고 그들이 자랑거리로 삼는 그것들을 자신도 못지않게, 아니 그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만큼 더 탁월하게 가지고 있음도 알고 있다. 그래서 그는 그들을 향하여 이렇게 말한다. “그들이 히브리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그들이 이스라엘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그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냐 나도 그러하다.”(고후11:22). 즉 사도는 자기가 신분에 있어서 그들에게 조금도 뒤지지 않는다는 선언이다. 그는 계속 말을 이어간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번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23-27절). 사도는 신분만이 아니라, 복음을 위하여 세운 헌신이나 공로에 있어서도 그들보다 비교할 수 없이 더 탁월한 경력을 갖고 있다고 드러내놓고 선언한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30절). 그런 것들은 자랑거리로 삼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이것들을 이렇게 떠벌리는가? 그는 이미 이 말들을 하기 전에 이렇게 전제를 하고 시작한 터였다. “여러 사람이 육신을 따라 자랑하니 나도 자랑하겠노라”(18절). 그러나 사도는 이런 것들을 자랑하는 것이 주님을 따라서 하는 말이 아니요, 이런 것들을 자랑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이것들을 드러내어 자랑하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다. 그러나 그것들을 자랑거리고 삼고 사는 사람들을 논박하고 설득하고 가르치기 위하여 부득이 한번은 그들의 차원에서 말을 해보겠다는 의도를 품고 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이 단락을 그렇게 시작한 것이었다. “내가 다시 말하노니 누구든지 나를 어리석은 자로 여기지 말라 만일 그러하더라도 내가 조금 자랑할 수 있도록 어리석은 자로 받으라. 내가 말하는 것은 주를 따라 하는 말이 아니요 오직 어리석은 자와 같이 기탄 없이 자랑하노라.”(16-17절). 그러나 그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이 단락을 그렇게 다시 돌아오면서 결론짓는 것이다.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30절)

외적인 신분으로나 자신이 이룬 공로로나 다른 사람들 앞에서 기탄없이 자랑할 만한 것을 자신이 가지고 있음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으면서도 어떻게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고 최종 결론을 내리며 살아갈 수 있단 말인가? 그 약함이 갖고 있는 그리스도 예수와의 관계 그 관계에서 갖는 역할과 의미 때문이다. 이것은 인격의 고매함이나 높은 도덕적 수준이나 비범한 성품의 문제가 아니라, 신앙의 문제라는 것이 바울이 분명히 하고자 하는 핵심이다. 이러한 논리는 외적인 조건들을 자랑거리로 삼는 사람들을 상대로 논쟁하는 빌립보서 3장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 정창균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총장, 설교자하우스 대표)

정창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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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레몬서 본문묵상과 탐구(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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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레몬서 본문묵상과 탐구(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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