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강해

빌레몬서 본문묵상과 탐구(9/9)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은 능력 – 주종관계를 뛰어넘어 사랑받는 형제로

사실 사도 바울이 오네시모를 이해하고 있는 것과, 실제로 그 사회에서 오네시모가 처해 있는 현실적 상황 사이에는 극심한 모순이 존재하고 있다. 본문 10-17절은 바울이 오네시모를 어떠한 사람으로 이해하고 있는가, 그리고 그를 어떠한 사람으로 받아들이고 있는가를 밝히고 있다. 그러면서 오네시모의 실제 신분이나 과거 경력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동시에 드러내고 있다. 그는 그 사회의 법과 문화가 인정하는 노예이다. 이와 같이 두 가지 다른 방향에서 본문이 오네시모에 대하여 밝히고 있는 사항을 대조해본다면, 바울이 받아들이고 있는 오네시모와 실제 그가 처하여 있는 법률적 사회적 상황에서 오네시모 사이에는 극심한 모순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는 범죄하고 도주한 노예이지, 영원히 함께 할 사랑하는 형제는 아니다. 이것은 어떤 점에서 바울의 오네시모와 빌레몬의 오네시모 사이의 차이이기도 할 것이다. 그런데도 바울은 오네시모를 그가 처해있는 사회적 상황과는 전혀 다른 입장에서 받아들이는 근거가 무엇인가? 무엇을 근거로 바울은 그러한 오네시모를 이러한 오네시모로 받아들일 수가 있는 것인가? 바울은 그 근거를 “주 안에서!”라고 분명하게 제시한다. “이후로는 종과 같이 아니하고 종 이상으로 곧 사랑받는 형제로 둘 자라. 내게 특별히 그러하거든 하물며 육신과 주 안에서 상관된 네게랴.”(16절). 그는 주종관계에서 형제관계로 옮겨간다. 주종관계에서는 명령과 복종이 최우선의 문제이고, 형제관계에서는 받아주고 영접해주는 사랑이 최우선의 문제가 된다. 그러므로 주종관계와 형제관계는 동시에 성립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여기 “종 이상으로”는 단순히 그 상태에서 좀 나은 정도를 의미하지 않는다. 이것은 다분히 공간적인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즉 그 세계를 뛰어넘어 다른 세계로의 이동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다. 종을 뛰어넘어 종이 아닌 상태로의 이동을 의미하는 것이다. 한글 개역성경은 “이 후로는 종과 같이 아니하고 종에서 뛰어나”라고 번역했었다.

그런데 바울은 지금 빌레몬에게 이것을 요청하고 있다. 법적, 사회적 신분으로는 분명히 주종관계인데도 그것을 뛰어넘어 형제관계로, 동역자 관계로(17절) 살아가는 모순이 가능하다고 전제하고 있다. 그리고 “주 안에서” 맺은 관계를 그 근거로 삼고 있다. “이 후로는 종과 같이 대하지 않고 종에서 뛰어나”는 단순히 시간적 전과 후를 말함만이 아니다. “주 안에” 있기 이 전과 이 후를 담고 있는 말이다. 마치 에베소 교회에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음을 중심으로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어떻게 혁명적으로 달라졌는지를 그 때와 이제에 대한 강력한 대조로 제시하던 바울의 확언을 다시 듣는 듯 하다.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엡2:12,13,19절).

결국 그리스도 예수가 이러한 모순을 극복하는 근거와 능력이다. 분명히 종인데 종 이상으로 대하며 사는 멋쟁이 인생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의 능력이다. 복음의 능력이다. 우리가 서로 그리스도와 맺고 있는 관계는 우리 사이의 관계인 “종”과 “주인”이라는 단어를 초월한다. 우리는 종이든 자유자든 모두가 그리스도 예수의 종이라는 한 가지 결론에 이르게 될 뿐이다. 사실 신자에게 있어서는 그가 세상에서 종인가 자유인인가 하는 것은 궁극적인 가치를 지니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에 대하여는 참 자유인이요, 그리스도에 대하여는 그의 종이라는 사실이 궁극적 가치요 보람일 뿐이다. 그러므로 삶의 현장에서 맺어져 있는 주인과 종의 관계는 같은 그리스도, 같은 주님에게 속해있다는 사실에 의하여 조정되어야 한다.
바울은 이미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이 사실을 강조했었다.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인이요, 또 그와 같이 자유인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니라”(고전7:22절). 바울이 오네시모 문제와 관련하여 빌레몬에게 던지는 도전의 핵심도 바로 여기에 있다. 종을 그 이상으로 형제나 동역자처럼 영접하고 사랑하며 사는 것이 사회적 관례나 법률적 이해로는 불가능하지만, 그리스도 예수와의 관계를 근거로 해서는 가능한 일이다. 문제를 그러한 시각에서 다루라는 것이다.

이 점에 초점을 맞추어 우리의 다른 사람 이해, 특별히 교회 안에서 다른 사람들에 대한 이해는 어떠한가, 그 사람의 신분이나 과거 경력 등을 근거로 한 것인가, 아니면 그가 관련을 맺고 있는 그리스도 예수를 근거로 한 것인가를 도전하면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결정적 근거와 기준을 확인하는 깊은 묵상을  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사도 바울이 오네시모 문제와 관련하여 빌레몬에게 던지는 도전을 통하여 우리에게 던지는 도전도 바로 이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사도의 요청을 받는 빌레몬에게 주어진 부담

우리는 지금까지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위하여 그렇게 절실하고 진지하게 간구하는 바울의 모습을 주목하였다. 그리고 바울이 그렇게 간청해주는 사람인 오네시모에 주목하였다. 그리고 그 모습이 얼마나 아름답고 귀한가를 확인하였다. 그런데 바울에게 이러한 요청을 받고 있는 빌레몬에게 초점을 맞추어 그의 입장이 되어 이 문제를 생각해보면 이야기는 사뭇 달라질 수 있다.

먼저 빌레몬이 사도 바울로부터 요청받고 있는 내용들이 무엇인가를 살펴보자. 크게 네 가지의 요청을 받고 있다. 첫째는 용서하라는 것이다. 바울을 용서하라는 것이 아니고, 오네시모를 용서하라는 것이다. 이것은 바울이 오네시모를 빌레몬에게 보내는 일에 가장 기본적인 것으로 이미 전제되어 있는 것이다. 오네시모는 빌레몬의 노예였다. 그것도 배신한 노예다. 당시의 관습이나 실정법으로 하면 그는 용서가 아니라, 죽여서 그의 죄 값을 묻고 또 배신으로 맺힌 한을 풀어야 속이 시원할 자이다. 그리고 그것이 당시에는 유난히 악하거나 잘못하는 것도 아니다. 모두들 그렇게 하고 있는 세상이다. 그런데 빌레몬은 사도에게 오네시모를 용서하라고 요청받고 있다. 둘째 요청은, 오네시모를 유익한 자로 인정하라는 것이다(11절).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큰 피해를 끼친 배신자를 유익한 자로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셋째 요청은, 오네시모를 사랑하라는 것이다. 종이 아니라, 종의 차원을 넘어서 형제로 대하라는 것이다. 그것도 사랑받을 형제로 대하라는 것이다(16절). 넷째는 주종관계가 아니라 협력관계, 즉 동역자로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그것도 바울과 동급의 동역자로 인정하라는 것이다(17절). 그래서 바울을 영접하듯이 오네시모를 영접하라는 것이다(17절). 즉 오네시모를 바울과 똑같은 사람으로 대하라는 것이다.

남는 궁금증
바울의 요청은 어떻게 되었을까? 바울의 편지를 받은 빌레몬은 어떤 반응을 보였고, 결국 오네시모는 어떻게 되었는가? 물론 본문은 바울의 요청을 담은 편지일 뿐이어서, 그래서 어떻게 되었는가를 그 안에 담을 수는 없다. 그러나 바울이 빌레몬에게 오네시모에 대하여 요청한 것이 그대로 받아들여졌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 편지가 정경 가운데 포함되었다는 사실로 그렇게 결론지을 수 있는 충분한 근가가 된다. 그렇지 않으면 이 편지는 빌레몬에게 전달 된 이후 폐기 되었을 것이다. 혹자는 오네시모가 훗날 에베소의 감독이 된 것으로 주장하기도 한다.

* 정창균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총장, 설교자하우스 대표)

정창균
Latest posts by 정창균 (see all)

그래도 의인은 제 길을 간다

세상이 이런데 언제까지 이러실 거냐고 따져 묻는 하박국에게 결국 하나님은 이렇게 되물으신 셈이었다. 세상이 이런데 너는 어떤 길을 갈 거냐고. 악인들로 세상이 뒤집어지고 있을 때 너는 어떤 길을 갈 거냐고. 그리고 하나님이 스스로 주신 답은 그것이었다. “의인은 그래도 제 길을 간다!” 세상이 어떻게 뒤집어져도, 신자는 여전히 제 길을 간다!

빌레몬서 본문묵상과 탐구(9/9)

바울이 받아들이고 있는 오네시모와 실제 그가 처하여 있는 법률적 사회적 상황에서 오네시모 사이에는 극심한 모순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는 범죄하고 도주한 노예이지, 영원히 함께 할 사랑하는 형제는 아니다. 이것은 어떤 점에서 바울의 오네시모와 빌레몬의 오네시모 사이의 차이이기도 할 것이다. 그런데도 바울은 오네시모를 그가 처해있는 사회적 상황과는 전혀 다른 입장에서 받아들이는 근거가 무엇인가?

빌레몬서 본문묵상과 탐구(8/9)

8절에 이르면서 사도는 본격적으로 빌레몬을 향한 용건을 밝히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것은 이 편지의 남은 부분 거의 전부를 차지하고 있다. 8절을 “그러므로”로 시작하는 것으로 보아 앞에서 빌레몬에 대한 소문을 근거로 그를 칭찬했던 것도 사실은 이 용건을 효과적으로 성취하기 위한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한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것은 오네시모를 위한 부탁이었다.

빌레몬서 본문묵상과 탐구(7/9)

오네시모를 통해서도 빌레몬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가능성도 있다. 빌레몬에 대한 소문을 들은 사도는 그에게 편지를 쓰는 용건을 본격적으로 다루기 시작하는 첫 마디에 감격에 차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기도할 때마다 너를 기억하고, 언제나 나의 하나님께 감사한다!”(4절). 사도에게 있어서 빌레몬은 기도할 때마다 그를 위하여 하나님께 간구하고 싶어지고, 그가 생각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가 터져 나오는 신자라는 것이다.

© Copyright - snthouse 성도와 신학 아카데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