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종려주일 설교- 울어야 할 진짜 이유

울어야 할 진짜 이유
누가복음 23:26-31
(눅 23:26) 그들이 예수를 끌고 갈 때에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이 시골에서 오는 것을 붙들어 그에게 십자가를 지워 예수를 따르게 하더라 (27) 또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오는지라 (28)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29) 보라 날이 이르면 사람이 말하기를 잉태하지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하리라 (30) 그 때에 사람이 산들을 대하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며 작은 산들을 대하여 우리를 덮으라 하리라. (31) 푸른 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 나무에는 어떻게 되리요 하시니라.

눈물

30년도 더 전에 부교역자로 사역할 때였습니다. 한 번은 설교하는데 나이 많이 드신 할머니 한 분이 설교 중에 계속 눈물을 흘리면서 우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 노인께서 내 설교에 은혜를 받으시는구나 싶었습니다. 그러자 힘이 났습니다. 용기와 자신감이 생겨서 소리를 더 질렀습니다. 저 같은 사람의 설교에 은혜를 받는 할머니가 얼마나 고마운지 예배 끝난 후 찾아가서 손도 잡아 드리고 이런 저런 이야기도 했습니다. 이야기를 하는 중에 그 할머니가 왜 내 설교를 들으면서 내내 눈물을 흘리며 우셨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깡마른 젊은 사람이 소리소리 지르며 설교를 하는 모습을 보면서 “젊디나 젊은 사람이, 먹고 살겠다고” 저렇게 소리를 지르며 노력하는 모습에 마음이 짠해서, 그리고 그런 저를 보면서 밖에 나가 있는 자신의 아들 생각이 나기도 해서 우신 것이었습니다. 얼마나 어이가 없고 힘이 빠지던지… 그 때 나는 우는 사람의 우는 이유와 그 눈물을 보는 사람의 해석이 얼마나 어처구니 없이 다를 수도 있는가를 경험하였습니다. 사람은 눈물에 어이없이 속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오래 전, 시중에 대단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키며 기독교인들의 눈에서 눈물을 쏟아내게 했던 영화가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수난(The Passion of Christ)”이라는 영화였습니다. 예수님이 고난당하시는 장면을 너무나 잔인할 정도로 사실적으로 그리고 자극적으로 묘사한 영화였습니다. 그 당시 저도 여러 사람들로부터 그 영화를 볼 것을 권유받곤 하였습니다. 그 영화를 보라고 권하는 말이나, 그 영화를 본 소감의 공통된 핵심은, 영화를 보면서 모두가 울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장로님들도 그 영화를 보고 울어서 눈이 벌개져서 나왔다는 둥, 여하튼 하나 같이 울었다는 이야기가 주를 이루었습니다. 그 영화는 예수님이 잡혀서 넘겨지는 순간부터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까지 얼마나 끔찍한 고통을 당하셨는가를 잔인할 정도로 생생히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영화가 보여주는 그런 주님의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이 우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도 왜 그 영화를 보면서 그렇게 우는 것인지를 묻거나 말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아마도, 그 영화를 보니 우리의 예수님이 저렇게 지독한 고난을 당하셨다는 것이 실감이 나고, 그런 고난을 당하시는 예수님이 너무 불쌍하고 딱해서 나오는 눈물 이었을 것입니다.

 본문

예수님이 붙잡혀 끌려가면서 고난당하는 그날의 그 현장에도 그렇게 우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붙잡혀서 고소당한 예수님을 두고 십자가에 못박아서 죽여버리라고 소리소리 지르며 재촉하는 여론을 더 이상 거스를 용기가 없던 빌라도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도록 군중들에게 내어주었습니다. 그리고부터는 십자가의 죽음을 향하여 끌려가며 예수님이 당하는 고난이 시작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 위해서 죽음의 길을 걸어갑니다. 그 뒤를 많은 백성이 따라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에 유독 사람들의 눈에 띄는 어떤 여자들이 있었습니다. 그 여자들은가슴을 치면서 슬피 울며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고 있었습니다. 이 여자들은 왜 가슴을 치며 왜 슬피 울고 있는가? “그를 위하여”, 즉 고난당하시는 예수님을 위하여 그렇게 한 것입니다(27절). 그렇게 한참을 가고 있는데, 고난당하며 멸시당하며 십자가의 죽음의 길을 향하여 가시는 예수님이 갑자기 서더니 뒤를 돌아봅니다. 그리고 이 여자들을 향하여 말씀을 하십니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28절)

이 여자들은 예수님을 위하여 괴로워하고, 슬퍼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대로라면, 그들은 잘못 울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마치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너희가 나를 위하여 울고 있는 것이라면, 너희는 잘못 울고 있다!” 채찍에 맞아 고통당하며 멸시당하며 뺨을 맞으며 조롱당하는 주님, 그리고 잔인한 모습으로 고통의 극치를 경험하며 십자가에 달려버리는 주님을 보고 그 주님을 위해서, 주님 때문에 울고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잘못 울고 있는 것이라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고난당하시는 주님을 보면서, 너무 안됐다고, 얼마나 고통이 크셨겠냐고, 얼마나 괴로우셨겠냐고, 얼마나 모욕적이고, 외로우셨겠냐는 생각이 우리의 마음을 압도하고, 그래서 그것이 우리의 감성을 자극하여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그래서 우리의 눈물신경을 자극하여 흘리는 눈물이라면 그것은 잘못된 울음이라는 것을, 고난의 길을 가다 말고 발걸음을 멈추고 돌아서서 깨우치시는 것입니다. 정말 불쌍한 것은 내가 아니고 너희와 너희 자녀들이라고 이들의 시각을 바꾸어 주시는 것입니다. 고난의 현장에 당사자로 계시는 주님은, 정말 불쌍한 것은 내가 아니고 너희와 너희 자녀들이라고 이들의 시각을 바꾸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고난을 볼 때마다, 생각 할 때마다, 우리가 울어야 되는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고난을 떠올릴 때마다 우리가 울어야 되는 진짜 이유는 무엇이란 말씀일까요?

울어야 할 진짜 이유

첫째는 우리 자신의 죄의 참혹함 때문에 울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당하는 혹독하고 참담한 고난을 보면서, 무엇이 하나님이신 그리스도를 가장 흉악한 죄인처럼 저렇게 참담한 모습으로 죽게 만들고 있는가를 생각하고, 하나님을 저렇게 죽여야만 그 값이 치러질만큼 참담한 나의 죄 때문에 울라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의 죄입니다. 우리의 죄가 얼마나 참혹한지, 얼마나 악독한지,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죽여야 되는 그런 죄였다는 것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 고난과 괴로움과 고통과 멸시와 천대는 내 죄로 말미암아 내가 당해야 될 그 모습이다. 나의 사랑하는 자녀들이 당해야 할 끔찍한 고통이 바로 저것이다! 나는, 내 자식들은, 하나님이 죽어야만 해결될 수 있는 그런 큰 죄인이다.” 라는 것을 생각하고 울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눈물은 나의 죄에 대한 참회의 눈물입니다.

둘째 진짜 이유가 있습니다. 주님이 당하는 고통을 보면서, 내 죄가 지금 저 고통으로 값이 치러지고 있다는 사실, 그 끔찍하고 참혹한 내 죄가 주님의 저 고통 때문에 값이 치러지고 용서를 받았다는 사실 때문에 울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고난으로 말미암아 내가 그 죄의 참혹함으로부터 해방 되었고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우리가 얻은 구원에 대한 감사와 감격으로 울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다 영원한 죽음과 지옥형벌로 우리의 죄 값을 치루어야 할 사람들인데, 우리 주님께서 저렇게 고통당하고 대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드디어 죄를 해결 받은 사람들입니다. 나는 이제 죄에서 풀려났다! 용서 받은 자가 되었다. 이제 해결이 되었다는 사실 때문에 울라는 것입이다. 그러므로 이 눈물은 나의 구원에 대한 감사의 눈물입니다.

너와 네 자녀를 위해서 울라 하신 주님의 말씀대로 우리가 울어야 되는 세 번째 진짜 이유가 있습니다. 아직도 주님이 지불하신 저 고난의 대가에 참여하지 못하고 있는 너와 네 자녀들, 죄 용서의 은혜에 아직도 참여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 그래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그 끔찍한 마지막 상황(29,30절)을 향하여 겁 없이 나아가고 있는 내 주변의 사람들, 그래서 언젠가 그 날이 이르면 탄식가운데서 영원히 늦어 버린 채 그 고통에 휩싸여 영원한 삶을 살아야 될 그 사람들을 생각하고 울라는 것입니다. 그 날이 오기 전에 주님이 저렇게 죄 값을 치루고 이루신 구원의 은총권 안으로 들어오게 해야 한다, 이대로 가게해서는 안된다 하는 마음으로 울라는 것입니다. 너무 늦어 버린 사람들을 위해서, 너무 늦어 버려서 “큰 산아, 나를 덮쳐다오. 작은 산아 내 위에 무너져다오!” 하면서 영원한 고통 가운데서 살아얄 운명에 처하게 될지도 모르는 구원 받지 못한 사람들을 위하여 울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서 끊어져있는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울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눈물은 다른 사람에 대한 안타까움의 눈물입니다.

 적용

주님을 죽인 내 죄에 대한 참회와 그 죄에서 해방된 자의 감사와 아직도 그 죄를 걸머지고 있는 이들에 대한 안타까움이 결국 눈물이 됩니다. 그래서 울다가 울다가 결국 우리가 확인하게 되는 한 가지 실체는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주님은 죄로 죽어버린 나를 향한 사랑 때문에 나를 위하여 목숨을 내놓아야 되는 그 길을 가신 것이란 사실에 직면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고난주간을 가장 의미 있게 보내는 확실한 방법은 사랑하는 것입니다. 검은 옷을 입고, 금식을 하고, 다소 슬퍼보이는 엄숙한 표정으로 성찬예배에 참석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도저히 용서 할 수 없었던 웬수를 고난주간을 기념하여 그냥 용서해버리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정말 관심 없이 지내던 어려운 사람에게 몇 푼 돈이라도 건네며 밥 한 끼라도 같이 먹는 것입니다. 주님이 사랑 때문에 죽으셨으니, 나도 그 사랑을 나누어주는 고난을 당해보는 것이 고난주간을 정말 의미 있게 보내는 모습일 수 있습니다.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바라보며 그 죽음을 향하여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신 날입니다. 그리하여 한 주 동안의 고난주간이 시작됩니다. 이 고난주간에는 주님의 고난과 죽으심을 바라보며 울어야할 진짜 이유를 발견하고 마음껏 주님을 붙잡고 울어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나를 그렇게 울게 하는 그 사랑으로 나도 이제 남을 울게 하는 일을 해보고 싶습니다. 그것이 비록 고난을 감수하고 고통을 걸머져야 하는 일이라 하여도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모두가 이 은혜를 누리는 금년 고난 주간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정창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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