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성령강림 주일을 향하는 7주간 시리즈 설교(제2주-1)

* 설교실제(2)

다음 설교는 사도행전 1:8을 본문으로 성령이 임하셔서 능력을 주시는 목적이 무엇인가에 초점을 맞추어 작성한 설교입니다. 그리하여 예수의 증인으로 사는 것이 성령의 능력을 받은 증거라는 점을 부각시켜서 증인의 삶을 사는 일을 강조하는 메시지를 전하려고 준비한 설교입니다.

제목 : 성령의 능력을 받은 증거
본문 : 사도행전 1:8

(행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증인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붙여주신 최후의 칭호가 있다면, 그것은 ‘증인’입니다. 제자들과 마지막으로 이별하는 현장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증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증인’이라는 말은 원래는 법정 용어입니다. 증인은 ‘본 사람’, 다른 말로 하면 ‘목격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향해서 “너희는 내 증인”이라고 하실 때, 그 ‘증인’은 법정에서 사용하는 그런 차원이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증인이라고 하거나, 예수님이 우리를 예수님의 증인이라고 말씀하실 때, 그 ‘증인’은 법정에서 쓰는 그런 차원의 증인이 아닌 것입니다. 여기서 ‘증인’은 단순히 그것을 본 목격자라는 말을 넘어서 그 사건에 참여한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아무리 예수님을 따라 다니면서 보았고, 예수님이 기적을 일으키는 것을 목격하였어도 그 예수님이 이끌어 가시는 역사에 참여한 사람이 아니면 증인이 아닙니다. 증인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말하는 증인은 ‘본 사람’이 아닙니다. 구경한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이끌어 가시는 구속의 큰 역사, 예수님이 친히 시작하시고 이어가시는 예수의 역사에 참여한 사람, 동참한 사람이어야 증인입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를 멋드러지게 하고, 예수님에 대한 책을 쓰고, 예수님에 관한 영화를 멋있게 만들었어도 그 사람 자신이 예수 믿는 사람이 아니면 예수님의 증인이 될 수 없습니다. 증인은 예수님의 역사에 자기 자신이 참여한 사람입니다. 사도행전에서 계속 암시하는 것은, ‘증인’은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사람, 예수님의 일을 구경했던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이 하시는 그 일에 동참한 사람이요, 예수님이 이곳에 계셨더라면 그분이 하셨을 그 일을 자기가 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결국 성경이 말하는 증인이란, 예수님이 복음을 위하여 당한 그 일들을 이제는 자신이 당하며 복음을 위하여 나아가는 사람입니다.

능력을 주시는 목적
그런데 이 증인이 증인다워지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성령이 오심으로 말미암은 능력입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이 말씀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쉽게 요약하면 이런 말씀입니다. “너희가 내 증인이 되어야 되는데 증인이 되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필요한 게 있다. 그것은 능력이다. 그런데 그 능력은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실 때 너희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증인 일 하러 나가지 마라.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이 성령을 기다리라.” 바로 ‘능력’이 갖추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증인이 증인될 수 있고, 증인의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능력을 받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 능력을 위해서 성령님이 오신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오셔서 능력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받기 전에는 증인의 일을 하러 나가서도 안되고 나가도 효과가 없다는 것입니다. 증인의 일을 할 수도 없고, 증인이 될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성령)을 기다리라.”

본문 8절에서 우리가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이와 같은 성령의 능력을 주시는 목적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국 제자들로 하여금 예수님의 증인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의 충만을 받고 반드시 일어나야 되는 결과는, 예수님의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성령의 충만을 받고 성령의 능력을 받았다고 하면, 그 능력을 받은 이유와 목적이 있는데, 본문에 말씀한 대로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주님의 복음이 이르게 하는 어떤 일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과 그의 복음이 땅 끝을 향해서 나아가는 그 역사가 일어나야 된다는 말입니다. 물론 이 말씀이 모두가 어디론가 선교사가 되어 떠나야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것은 이런 능력을 받은 다음에는 예수님이, 그분의 복음이 나를 통하여 어디에선가 증거 되어야 된다는 말입니다. 결국 약속된 성령이 오셔서 우리에게 주시는 능력은 우리 자신의 이름이나 명성과 관계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이름과 관계된 것입니다. 예수의 증인이 되기 위한 능력입니다. 예수의 이름이, 예수의 왕국이 땅 끝을 향해서 퍼져 나가는 그 일을 하게 하는 그 능력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성령의 능력을 받았는가 아닌가를 판별하는 것은 간단합니다. 나를 통하여 예수님이 드러나는가 아닌가입니다. 나를 통하여 복음이 땅 끝을 향해서 확장되는 일이 나타나는가? 그렇다면 나는 성령이 임하신 사람이고, 성령의 능력을 받은 사람입니다. 예수는 간 곳 없고 능력 받았다는 그 사람의 이름만 자꾸 나타나는가? 그러면 그 사람은 성령이 임한 사람도 아니고, 성령의 능력을 받은 사람도 아닙니다. 이것을 눈여겨 보아야합니다. 그런데도 의외로 성령의 충만함으로 받았다는 그 능력이 자기 자신의 이름을 증거 하는 능력으로 쓰이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성령 충만 받고, 희한한 능력을 받았고, 은사를 받았다고 하는데, 가만히 보면 그 능력을 받은 이후에 예수는 간 곳 없고, 그 능력 받은 사람만 나타난다는 말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잘 못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성령을 약속하시고 능력을 약속하신 분명한 목적은 그 능력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나타나게 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능력을 주시는 것은 제자들의 이름이 만방에 드러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능력은 예수님의 증인이 되는 능력입니다. 복음이 확장되는 능력입니다. 성령 충만을 받은 경우에는 그것이 나타나야 되는 것입니다.

증인되기를 포기하지 않는 능력
성령 충만으로 받는 능력은 한마디로 요약하여 말하면, 결국 ‘예수의 이름을 위해서,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증거를 위해서 자기가 죽는 능력’입니다. 자기가 고난당하는 능력입니다. 복음을 증거 하는데 누가 감옥에 가두려하면 가두려하는 자에게 눈만 부릅떠도 그 사람이 엎드러지게 하는 그런 능력이 아니라, 복음을 위해서 기꺼이 감옥에 갇히는 능력입니다. 돌이 날아오면 손바닥을 펴서 그 돌을 유턴을 시켜서 날려 보내어 돌을 던진 자들의 이마에 박히게 하여 통쾌하게 복수를 해주는 능력이 아닙니다. 그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예수는 그리스도시다”는 고백을 포기하거나 바꾸지 않는 능력입니다. 결국, 어떤 경우에도 예수님에 대한 고백과 증거를 바꾸지 않는 능력인 것입니다. 우리는 자주 ‘성령을 부어주시사 내게도 능력을 주옵소서.’ 하고 기도하면서, 그 능력이란 말을, ‘나도 이제 성령 충만 받고 능력 좀 받아서 그 동안 기죽어서 지내던 거 보란 듯 기도 한번 펴보고, 그 동안 매일 월세금 챙기느라고 쩔쩔맸는데 이제는 그런 걱정 없이 돈도 떼돈으로 한번 벌어보고, 그저 손만 얹어도 앉은뱅이가 벌떡벌떡 일어나서 나도 한번 이름 날리면서 정신없이 여기저기 불려 다니면서 집회도 해보고… 내가 열심히 주의 일을 하는데 가시 노릇했던 사람들이 내 앞에서 팍팍 쓰러져 나가고… ’ 그런 것을 염두에 두고 능력을 사모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능력, 성령이 충만이 임함으로서 우리에게 임하는 그 능력은 그런 능력이 아니라고 사도행전은 처음부터 강조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의 증인은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증인이 아니라, 예수를 드러내는 증인입니다. 그러므로 이 증인에게는 내가 어떻게 되는가 하는 것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잘되므로 이 증인의 역사가 잘 이루어진다면 잘 되는 것입니다. 그게 능력입니다. 내가 죽음으로, 가난해지므로 이 증인의 역사가 잘 이루어진다면, 죽는 것이 능력입니다. 가난해지는 것이 능력입니다. 누군가에게 내 자존심을 건드리는 말 한마디만 들어도 견딜 수 없어서 ‘교회를 그만두네, 마네’ 했던 사람이, 이제는 내 자존심이 아니라 얼굴에 침 뱉음을 당해도 “나는 그만 둘 수 없어” 하고 달려 붙는 그 능력입니다. 40년 된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기적을 행하자 사람들이 떼로 모여들어 나의 추종자가 될 차비를 하고 있을 때에도, “나는 아니라”고 “내가 아니라”고 손을 내저으며 거절하고 예수님에게로 그들의 시선을 돌려놓는 그런 능력입니다. 이전에는 누가 상처 되는 말 한 마디하고, 목사가 조금만 나에게 소홀히 해도 ‘내가 그런 교회 나가는가 봐라. 내가 다시는 일을 하는가 봐라’ 하며 나자빠졌던 사람이 ‘내가 목사 때문에 교회 나가나? 나는 예수님 때문에 일하는 사람이야.’ 하며 더 열심히 주님의 일을 하는 그런 능력입니다. 상처를 받고 아픔을 당하면서도 예수님을 포기하지 않는 능력인 것입니다. 우리가 열렬하게 사모해야 하는 능력은 바로 이런 능력입니다. 성령님이 임하시면 우리에게 이 능력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이 알지 못하는 신자들의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진정한 신자는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자라고 말씀합니다.

증인으로 부르심
우리는 예수님를 위해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증인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내 증인이 되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 당시 그 현장에 있었던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만 한 것이 아니라, 우리들에게도 하신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 증인의 일은 계속될 것입니다. 하늘로 올리워 가신 주님이 그 모습대로 다시 오실 그날까지 오고 오는 제자들의 계속적인 사역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 사역을 감당하기 위하여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시고 우리에게 능력을 부어주십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복음을 위해서, 예수의 이름을 위해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서는 ‘내가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하고 나서는 능력 있는 증인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능력으로 하루하루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 주님의 증인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정창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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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 주일을 향하는 7주간 시리즈 설교(제2주)

성령이 오시면 주신다는 그 능력은 구체적으로 무슨 능력인가? 본문만 가지고는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말씀을 안 하셨기 때문입니다. 능력을 받아서 증인이 된다고만 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능력에 대한 자기 자신의 생각을 가지고 이 능력을 말하곤 합니다. 그리고 성령이 그 능력을 주실 것이라고 믿고, 그 능력을 사모합니다.

부활절 이후 7주간 성령설교(제1주)

그런데 주님은 이들에게 아주 중요한 약속을 확실하게 하십니다.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너희에게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보내주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성령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명령을 하십니다.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면 너희는 땅 끝까지 가서 나의 증인이 되라.” 이렇게 말씀하신 후에 예수님은 제자들을 땅에 남겨놓으시고 그냥 가셨습니다. 고아처럼 버려 두지 않으시겠다고 하던 주님이 고아처럼 버려두고 가셨습니다. 기약도 없이 때도 없이 주님이 떠나가셨습니다.

부활절 설교- 사망을 이기고 부르는 노래

하나님이신 우리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역사가 거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죽으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구주께서 다시 살아 나셨습니다. 부활하신 것입니다. 죽음이 역사적 현실이고 구체적 사건이고 개별적 경험이듯이, 부활도 구체적 사건이요 역사적 현실이요 개별적 경험입니다. 죽음의 시체가 거기 있었듯이, 부활한 몸체가 거기에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부활을 말씀하면서 그것은 당연히 죽음 몸이 다시 살아나는 것으로 전제하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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