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를 위한 신학

한국교회, 절망과 소망의 이중성

한국교회가 위기 상황에 처하여 있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하지 않는 현실입니다. 우리는 한국교회의 현실을 위기 상황이라는 전제 아래 관찰하여 그 위기 상황의 실상이 무엇인지를 규명하고 이러한 상황이 초래하게 된 근본적인 원인이 무엇인가를 밝히면서, 이러한 위기 상황이 한국교회에 주는 의미와 극복을 위한 방안을 제시해보려고 합니다.

한국교회의 위기 상황

양적 성장의 쇠퇴

교회의 양적 성장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한국교회는 위기에 처했다는 진단이 이미 1990년대 초부터 여러 곳에서 제시되어왔습니다. 한국교회가 이미 침체기에 접어들었다는 것은 아무도 부인하지 않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진단은 일차적으로 90년대에 접어들면서 시작된 한국교회의 숫자적 침체를 많은 이들이 그 근거로 들고 있습니다. 실제로 2005년 통계청이 조사한 국민주택 총 조사에 의하면 종교를 갖고 있는 종교 인구는 2005년 11월 1일 현재 국민 전체의 53.1%인 2,497만 명입니다. 이것은 1995년 이후 10년 동안 238만명이 증가한 것으로 10.5%의 증가율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 가운데 불교 인구가 약 1,072만 6천 명으로 1995년부터 10년 동안 40만 5천 명이 증가하였습니다. 반면에 개신교 인구는 861만 6천 명으로 전체의 18.3%였으며 1995년 인구주택 총 조사 때보다 14만 4천 명이 감소하였습니다. 가톨릭 신자는 514만 6천 명으로 전체의 10.9%이며, 1995년 인구주택 총 조사 이후 10년 동안 219만 5천 명이 증가한 수치입니다.1) 한국의 3대 종교 가운데 불교도 성장을 기록하고 특히 천주교는 급성장을 이루고 있음에 비추어 개신교만이 감소하는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앞으로 20년 후에는 기독교 신자의 수가 500만 명대가 무너지고 400만 명대로 감소할 것이라고 예측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개신교 인구가 이렇게 감소하고 있는 위기 상황의 근본 원인이 무엇인지는 다양하게 제시될 수 있을 것입니다.2)

아무튼 1960년대부터 30년 가까운 기간 동안 기독교 역사상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의 급성장을 누려오던 개신교가 이렇게 성장침체를 거쳐 마이너스 성장으로 돌아선 현상 자체가 한국교회의 위기 상황으로 인식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도덕성 상실로 인한 사회적 불신

한국교회가 직면하고 있는 양적 성장의 침체보다 더 심각한 위기 상황은 도덕성 상실로 인한 대사회적 영향력의 쇠퇴와, 더 나아가 교회 안팎으로부터 받는 불신과 비난입니다. 기독교윤리실천운동(기윤실)이 한국교회에 대한 한국 사회의 신뢰도를 측정하기 위하여 수행한 여론 조사의 결과는 한국교회가 사회로부터 받는 신뢰라는 관점에서 볼 때 얼마나 큰 위기 상황에 처해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3)

이 조사에서 기독교는 가톨릭(35.2%), 불교(31.1%)에 훨씬 못 미치는 신뢰도(18.0%)를 얻고 있습니다. 특히 종교가 없다고 응답한 사람들 중에 가장 신뢰하는 종교로 기독교회를 선택한 응답자는 겨우 7.6%에 그치고 있는 반면 가톨릭 교회를 가장 신뢰한다는 응답자는 37.9%, 불교는 29.0%를 얻고 있습니다. 한국교회에 대한불신자 곧 한국 사회의 신뢰도가 다른 종교들에 비하여 훨씬 떨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국교회에 대한 신뢰도가 이렇게 저조한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서 교회가 노력해야 할 것들은 무엇인가에 대하여는 봉사 및 구제 활동(47.6%), 윤리와 도덕실천 운동(29.1%)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신뢰 상실의 결정적인 원인이 도덕성의 상실 혹은 도덕적 부패에 있음을 드러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한국교회의 도덕적 실패가 앞에서 지적한 양적 침체의 중요한 원인이 되고 있다는 판단을 할 수도 있습니다. 사실, 교회 때문에 교회에 안 나간다는 사람이 의외로 많이 있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바입니다. 목회자나 혹은 교회가 범한 도덕적 문제가 원인이 되어 교인들이 떼 지어 다른 교회로 옮겨가거나, 아예 신앙생활을 중단해버리는 교인들도 늘어가고 있으며, 그것이 더 심해져서 이제는 아예 다른 종교로 개종하는 사람이 늘고 있기도 합니다. “교회 때문에”라는 말의 핵심적인 내용은 개인 신자들과 그들이 모인 공동체로서의 교회들이 이 사회가 그들에게 걸어온 기대에 부응하는 “신자다운 삶”을 살고 있지 않음에 대한 실망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 사회 안에는 이미 반기독교 운동을 조직적으로 강력하게 펼치는 그룹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 일부는 시민 단체로 발전하기도 하였습니다. 반기독교 그룹이나 시민 단체들이 내세우는 반기독교적 주장의 내용들은 대부분 한국교회의 도덕성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습니다.4) 그리하여 이제는 교회 밖의 시민 단체들이 교회를 개혁하겠다고 소리를 높이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교회와 교회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능욕을 당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 나라에서 확산되고 있는 조직적이고 과격한 반기독교 운동들은 다분히 그동안 한국 기독교인들이 불신 사회에 대하여 보여준 윤리적 실패로부터 기인했다는 점에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우선적인 책임이 있습니다. 말하자면 신자들이 신자가 아닌 것처럼 살고, 교회들이 교회가 아닌 것처럼 처신해온 것의 결과인 것입니다.

사회와 타종교로부터의 반기독교적 압력

한국교회는 위에서 언급한 것과는 또 다른 양상의 위기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이 나라의 기독교 운동은 반교회 운동으로 나아가다가, 이제는 반 그리스도 운동, 그리고 반유일신 운동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예수님만이 유일한 구원자라는 신앙, 하나님만이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라는 믿음을 버리라는 강하고 과격한 요구를 쏟아내고 있는 실정입니다. 예수만이 유일한 구원자라는 배타적교리와 오직 하나님만이 유일하신 하나님이라는 독선적 교리를 버

리고 종교 간의 화합과 상생의 장으로 나아와서 다른 종파들과 손에 손을 잡고 화합하여 이 사회의 화합과 평화에 기여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근래에 한국교회가 직면하고 있는 최대의 도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한국교회가 이 사회와 타종교로 부터 당하는 기독교의 정체성에 대한 심각한 도전입니다. 그런데 적지 않은 수의 교인들, 심지어 교회의 지도자들 가운데도, 이제 우리도 사회의 화합과 종교 간 상생을 위한 이러한 요구들에 부응해야 하며, 그것이 한편으로 기독교가 이 시대에 이 사회에서 직면하고 있는 침체와 소외의 위기를 극복하고 생존할 수 있는 길이라는 의견을 스스럼없이 개진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비록 일부라고는 하지만 위와 같은 반기독교적 도전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이러한 반응 자체가 한국교회가 직면하고 있는 또 다른 양상의 위기 상황입니다. 물론 이 사회의 윤리와 도덕 수준을 높이기 위하여 여러 종파들이 함께 협력하여 캠페인을 벌이고 계몽 운동을 할 수 있습니다. 빈곤 문제를 구제하기 위하여 종파를 초월하여 손에 손을 잡고 함께 구제 사업을 펼치는 것은 가능할 뿐만 아니라, 당연한 일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모든 종파가 자기됨의 독특성을 포기하고 한데 섞여 혼합되어야만 가능한 일이라는 논리는 대단히 잘못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운동을 하기 위하여 반드시 그 운동을 주도하는 종교의 집회 장소에 모여서 모두가 그 종교 방식의 제사나 예배를드린 후에야 행사를 해야만 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이 사회의 반기독교적인 저항들에 대하여 기독교의 이미지를 개선하기 위해 서 기독교만의 독특한 신앙고백이나 구원관을 내려놓거나 아니면 최소한 그것을 드러내놓고 강조하는 것을 삼가고 서로 화합하자는 생각을 기독교인 자신들이 스스럼없이 하는 것은 이 나라 교회가 처한 심각한 위기 상황입니다.

이단에 대한 무방비 상태

이단들은 기성 교인들을 대상으로, 교리 논쟁, 독특한 성경해석을 통한 기성 교인들의 호기심 충족이나 기성 교회에 대한 비판이 나 불만 해소, 기성 교회의 윤리적 비리 등에 대한 비판을 주요 도구로 사용하여 기성 교회의 교인들을 혼란에 빠뜨리고 자기 집단으로 빼돌리는 일을 왕성하게 벌이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교리적 이탈 즉 전통적 교리에 대한 왜곡이 이단들의 가장 큰 특징입니다. 예를 들어, 근래에 한국교회에 가장 큰 폐해를 끼치며 주목을 받고 있는 신천지 이단은 황당한 본문 해석과 이만희 중심의 어이없는 교리를 주장하는 대표적인 집단입니다.5) 그런데도 수많은 기존의 정통 교회의 교인들이 신천지 이단에 끌려들어가고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오히려 신천지에서 들은 내용을 가지고 기존의 정통교회에서는 들어 보지 못한 심오하고 깊이 있고 철저하게 성경중심적인 가르침이라고 당당하게 주장합니다. 이렇게 기존의 교인들이 이단의 미혹에 쉽사리 빠져들어가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교회 예배와 봉사에 열심히 참석하던 교인들이 어느 날 갑자기 신천지 이단에 모든 것을 바치며 헌신하는 데로 가버리는 현실이 정통 교회의 설교와 설교자에게 던지는 도전이

무엇일까요? 신자들이 어느 가르침이 성경적인지 반성경적인지를 분별할 수 없는 허약한 체질이 되어버린 근본적인 원인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그들의 개인적인 무책임과 무지함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그들이 그동안 교회와 신자의 정체성을 확립하여 어떤 가르침이나 주장에 대한 신학적, 성경적 분별력을 행사할 수 있을 정도로 자라가게 하는 설교를 듣지 못하며 교인 생활을 해온 데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기존 교회의 설교와 설교자들의 책임입니다. 그러므로 신천지 이단에 대한 대응은 설교자들 이 성경을 제대로 설교하며, 교회와 신자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에 목적을 둔 설교를 소홀히 해왔다는 반성으로부터 시작해야 할것입니다.

이만희 씨가 그렇게 황당한 알레고리 해석과 억지 해석 그리고 말도 안 되는 자의적 해석을 일삼는데도 오랫동안 신앙생활한 정통 교회의 신자가 아무런 이질감도 느끼지 못하고서 오히려 그것을 기존 교회 목사에게서는 들어보지 못한 심오한 성경 중심 설교라고 좋아하는 것은, 아마도 그들이 기존 교회에서 그러한 알레고리 해석과 자의적 해석 등에 익숙해 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이단의 문제는 기독교 역사가 시작된 이래 언제나 그리고 지속적으로 있어 온 문제인 것이 사실이지만, 지금 한국교회 안에 신천지 이단을 중심으로 한 다양한 이단이 극성을 부리고 있거나 혹은 이단적인 가르침들이 교회 안에서 확산되고 있는 것은 한국교회가 직면하고 있는 특별한 위기 상황 가운데 하나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위기 상황의 원인

위에서 제시한 것과 같은 한국교회의 위기 상황이 초래된 원인이 무엇인가에 대하여는 다양한 의견이 제시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위기 상황이 닥치게 된 원인은 관점에 따라 다양하게 설명될 수 있습니다. 우선 사람에 초점을 맞출 때, 즉 누구의 책임인가라는 관점에서 원인을 분석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위기상황의 본질, 즉 무엇이 위기 상황의 본질인가라는 관점에서 원인을 분석해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유발한 가장 근본적인 원인이 무엇인가를 추적해 볼 수 있습니다.

지도자의 문제

이러한 사태가 벌어진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 것인가라는 관점에서 한국교회 위기 상황의 원인을 추적한다면 그것은 한국교회지도자들이라는 데에 이견이 없을 것입니다.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이라고 불리는 구체적인 대상은 우선적으로 목회자들과 장로들일 것입니다. 한국교회 지도자의 문제란 크게 두 가지 측면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인격, 영성, 신앙, 삶 등 각 지도자들의 개인적인 자질의 문제입니다. 둘째는 교회 지도자 간의 관계 설정의 문제입니다. 지도자들 사이의 관계 설정은 크게는 교회와 교회의 관계를 말하며, 좁게는 한 교회 안에서 목회자와 장로 사이의 관계를 말합니다.

지도자들 사이의 관계설정은 크게는 교회와 교회의 관계를 말하며, 좁게는 한 교회 안에서 목회자와 장로 사이의 관계를 말합니다. 교회와 교회 혹은 한 교회의 목회자/지도자와 다른 교회의 목회자/지도자의 관계는 무관심이거나 경쟁 관계가 기본적인 관계 설정이 라는 것이 교회 안팎으로부터 받아온 오랜 비판이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다시 말하면, 개교회주의요 자기중심주의입니다. 한 교회의 목회자와 장로 사이의 관계는 긴장과 갈등의 기조 위에서 유지되고 있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교회가 교회다워지고, 교인들이 신자답게 되기 위한 한 목적을위하여 배려하고 협력하고 일체감을 갖는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가를 깊이 반성해봐야 합니다. 한국교회는 지도자 개인의 자질에 있어서나, 교회를 이끌어가는 지도자들 사이의 관계 설정에 있어서나 심각한 문제를 지닌 채 오랜 세월을 지내왔다는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지금도 사회가 온갖 비난으로 교회를 모욕하는 빌미를 제공하고 있는 주체는 다름 아닌 교회의 지도자들입니다.

신자와 교회의 정체성의 상실

한국교회가 직면하고 있는 위기 상황은 그 양상이 어떠하든지 본질적인 요인은 결국 신자와 교회의 정체성의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도덕성의 상실로 말미암은 대사회적 신뢰도 추락의 위기든지, 기독교만의 신앙을 버리라는 도전과 다른 종교에 대하여 상생적, 화해적이기 위하여 자신의 신앙고백을 타협함으로 직면하는 위기 상황이든지, 영적, 성경적 분별이 없이 터무니없는 가르침들에 현혹되어 이단에 빠져드는 상황이든지 이러한 위기 상황의 가장 본질적인 요인은 결국 그리스도인들의 자기 정체성의 상실, 혹은 정체성의 혼란으로부터 야기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모든 현상의 공통적인 문제는 다름 아닌 정체성의 문제입니다. 사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은 한국교회 지도자들의 문제도 그 본질은 정체성의 문제입니다.

20세기의 위대한 교회사가로 알려져 있는 라토렛(Kenneth Scott Latourette)이 그의 대작인 『기독교 확장사』 마지막 부분에서 교회의 장구한 역사를 되돌아보면서 한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그의 말은 교회의 정체성을 확고히 지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문제인가에 대한 증언이자 경고이기도 합니다. 그는 “시간과 공간 속에 얽매이지 않은 자신의 정체성을 희생하고 주변의 환경에 순응하였던 교회들은 결국 자신들이 그렇게 순응했던 시대와 사회, 그리고 기류가 바뀌면서 모두 소멸해 버리고 말았다”고 단언합니다. 그는 “다만 예수의 유일성에 대한 핵심적인 진리와 역사상 발생한 사건으로서 예수의 탄생과 생애, 가르침, 죽음과 부활에 대한 진리, 그리고 하나님 자신의 계시와 인간의 구속을 위하여 예수를 통해 역사하신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믿음의 진리만이 영속적인 삶을 위해서 필수적인 것으로 입증되었다”고 결론짓습니다.6)

정체성이란 신자의 신자다움과 교회의 교회다움을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자신은 무엇을 믿으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확실한 인식입니다. 역사적으로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극심한 핍박이나 유혹에 직면하여 때로는 억울한 비난을 감수하기도 하고, 핍박을 자청하기도 하고, 당대의 사회로부터 한편의 소외 그룹으로 따돌림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상황에서도 세상에 굴복하지 않았던 근저에는 자기의 정체성에 대한 확고한 인식, 곧신자가 신자 아닌 것으로 될 수 없고, 교회가 교회 아닌 것으로 변절할 수 없다는 자기 인식의 확고함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신앙 회복인가 도덕성 회복인가

이런 점에서 한국교회의 위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성경적 정체성을 회복하는 것이 도덕성 혹은 윤리성 회복과 사회적 실용성을 충족시키는 것보다도 더 시급하고 근본적인 문제라는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사실 오늘날의 교회가 도덕적으로 이렇게 비난을 받게 된 근본 원인이 무엇인가를 따지고 들어가 보면, 그것은 그동안 한국교회 신자들의 신앙생활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신자답게 살지 않고, 교회답게 행동하지 않아서 벌어진 현상이라는 말입니다. 이러한 참담한 현상이 계속되면서 교회를 염려하는 의식 있는

지도자들과 단체들이 한국교회의 신뢰 회복을 위하여 다양한 방식의 운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교회 재정의 투명한 운영, 목회 세습반대 운동, 구제 활동의 확대, 사회 복지를 위한 적극적 참여, 교회운영의 민주적 방식 도입 등등 다양한 운동들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운동들은 모두 한국 기독교가 도덕적으로 그리고 윤리적으로 세상의 인정을 받을 만큼 회복되어야 한다는 절박한 현실 인식을 바탕에 깔고 있습니다. 실제로 여러 단체나 개인들이 제시하고 있는 한국교회의 위기 상황에 대한 진단과 해결을 위한 대안들은 주로 도덕성 혹은 윤리성 회복과 사회적 실용성을 갖추어야 한다는 데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도덕성을 갖추고 사회적 효용성을 충족시키는 특정의 행동 양식들을 실천하는 것에 궁극적인 관심이 모아지는 것은 신앙 단체인 교회에 또 다른 치명적인 문제를 일으킬 위험이 있음도 알아야 합니다. 교회는 단순히 도덕 수준이 높은 단체나 혹은 사회구호 단체에 머물러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신자가 신자답게 되고, 교회가 교회답게 되면 반드시 도덕성이 뛰어나게 되고, 구제활동이 활발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도덕성이 뛰어나고 구제 활동이 활발하게 되는 그것이 교회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본질과 외형을 분별하는 지혜가 필요하고, 외형이 아니라 그 외형을 만들어내는 본질을 회복하는 운동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신앙과 도덕성을 서로 나누어 도덕성은 별 것이 아니고 신앙이 중요하다는 그런 말이 아닙니다. 이둘은 같이 가게 되어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는 “행함”을 극도로 강조합니다. 그리고 야고보서가 말하는 “행함”의 구체적인 내용은 도덕적, 그리고 윤리적 행위들입니다. 그런데 야고보서는 행함을 믿음과 관련지어 말하고 있습니다. 행함은 믿음이 만들어내는 것이며, 그러므로 행함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의 이러한 강조에는 행함이 믿음을 만들어내지는 않는다는 것이 이미 전제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행함이라는 열매를 보려면 믿음이 참 믿음 혹은 살아있는 믿음이 되도록 해야 하지, 그 행위 자체를 하나씩 어디서 갖다가 붙여서 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셈입니다.

출애굽기 1장의 히브리 산파들의 이야기는 이 문제와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사실을 말해줍니다. 히브리 산파들이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왕명을 어기고 남자아이들을 죽이지 않은 것은 그들이 휴머니스트들이어서가 아니었습니다. 생명에 대한 경외심 때문만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기 때문이었습니다(17, 21절). 본문이 일관되게 우리에게 주목하도록 요구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산파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답게 사느라고 왕명을 어기는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남자아이들을 죽이지 않았고, 그들의 그러한 행동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복을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히브리 산파들에게 남자아이들을 죽이고 살리는 것은 도덕성이나 인간 존중의 문제이기 전에 신앙의 문제였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요셉이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에 말려들지 않은 것도 그의 높은 도덕성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 죄를 범하지 않아야 한다는 그의 신앙의 발로에서 온 결과라는 것이 창세기 39장의 선언입니다(9

절). 외형이 같다 해서 본질도 언제나 같은 것은 아닙니다. 한국교회는 도덕성이 없어서 문제가 아니라, 신앙대로 살지 않아서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를 교회답게 하고, 신자를 신자답게 하는 것이 한국교회의 가장 시급한 일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다름 아닌 신앙인의 정체성과 교회의 정체성을 확고하게 하여 그 정체성에 걸맞은 신자의 모습과 교회의 모습이 이루어질 때 비로소실현되는 문제입니다.

말씀 이탈!

말씀 이탈이란 말씀에서 벗어나거나, 말씀을 떠나거나, 말씀을 소홀히 여겨서 말씀을 자신의 생각과 판단과 처신의 기준으로 삼지 않고 말씀 이외의 다른 것에 우선순위를 두는 현상을 말합니다. 이것은 구체적으로는 말씀에 대한 무지와 말씀에 대한 순종이 없는 삶을 수반합니다. 그러므로 말씀 이탈은 곧 삶 속에서의 말씀의 실종을 말합니다. 이러한 현상은 신자의 삶과 교회 안에서 말씀의 침묵으로 이어지고, 그것은 다시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침묵을 초래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침묵은 곧 하나님의 부재로 이어집니다. 그리하여 나타나는 필연적인 현상은 신자가 신자 아닌 것으로, 교회가 교회 아닌 것으로 변절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 이탈이야말로 신자와 교회가 정체성을 상실하게 되는 근본적이고 결정적인 원인입니다.

말씀 이탈을 주도해온 현장

말씀 이탈 현상을 주도한 가장 대표적인 현장은 바로 강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그동안의 설교들은 말씀에 집착하여 신자와 교회의 정체성을 강조하고 가르치기보다는 위로와 격려와 축복과 성공 등 소위 부와 건강의 복음을 선포하는 데 힘을 쏟아왔다는 비판을 면하

기 어렵습니다. 재미있는 설교, 편안한 설교, 축복이 넘치는 설교를 지향해왔습니다. 교회에 대한 강조도 교회의 본질에 관한 성경말씀의 가르침보다는 주로 일과 봉사 등을 강조하며 교회의 기능이나 실용성 등 교회의 기능적 정체성에 초점을 맞추어 설교를 해온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 와중에 설교는 점점 본문을 이탈한 설교로 변질하게 되었습니다. 신천지 이단의 파장이 이렇게 크게 나타날 수 있었던 것은 성경에서 멀어져서 성경적이고 신학적인 분별을 갖추지 못한 신자가 많아진 현실이 만들어낸 결과라고 해도 지나친 과장이 아닐 것입니다. 신천지의 교주인 이만희 자신도 신천지가 성경에 의한 참된 교회임을 주장하기 위하여 정통 교회의 이 점을 비난합니다. “요즘의 교회는 모두 사람에 의한 사람을 위한 교회로 변질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는 천국 복음을 가르쳐야 하는데도 세상 이야기나 하며 성도의 수를 불리는데 주력하고 있으니 세상 교회가 아니라 하겠습니까?”7) 이만희는 이 점을 간파하여 성경 해석을 주무기로 들고 나오면서 자신들이야말로 성경을 제대로 풀어준다고 속이며 교인들을 미혹합니다. 그 전략이 통하여 지금과 같이 큰 파괴력을 한국교회 안에 행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의 존재가 복음에 어긋나는 것을 말하고 있는 한, 설교자가 복음을 말해도 그것은 반복음적인 것이 된다”8)는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우리는 지금 경험하고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복음에 어긋나게 살고 있다는 것이 교회를 공격하는 자들이 자신 있게 쏘아대는 화살인데, 우리는 그것을 되받아쳐낼 방패를 잃어버렸습니다. 계속하여 성공과 축복과 위로와 격려와 간증, 그리고 우스운 이야기 등을 설교에서 들어온 사람들이 성경을 근거로 한 심오한 가르침이라면서 다가온 내용들을 놓고 그것이 성경적인 것인지, 성경을 제대로 해석하고 있는 것인지, 그리고 그들이 성경을 펴놓고 하는 그 말이 과연 신자나 교회에 대하여 맞게 말하고 있는 것인지 분별을 할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들이 이단의 가르침에 현혹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성경을 설교하고 신자와 교회의 정체성을 확고하게 해주는 성경적 설교를 회복해야 합니다.

이 시대의 가장 큰 문제는 교회가 어두워진 것이고, 교회가 어두워진 가장 심각한 원인은 강단의 말씀 이탈입니다. 이것은 다름 아닌 강단의 변절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책임의 한 가운데 설교자가 있습니다. 설교자는 말씀에 목숨을 거는 사람입니다. 설교자가 말씀을 임의로 바꾸어 말하거나, 말씀보다 다른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반역입니다. 말씀의 주인이신 하나님에 대한 반역이요, 말씀을 기다리는 회중에 대한 반역이요, 말씀의 사역자인 자기 자신에 대한 반역입니다. 설교자의 반역이 오늘날 강단이 죽은 가장 큰 원인입니다. 그러나 강단이 말씀 이탈의 주범이 된 데에는 전적으로 설교자들의 잘못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재미있는 설교, 편안한 설교, 축복이 넘치는 설교, 부담을 주지 않는 설교, 위로와 격려가 넘치는 설교만을 듣고 싶어 하고 그렇게 청중의 가려운 귀를 긁어주는 설교를 해주는 설교들을 좋아하는 교인들의 잘못도 적지 않습니다. 그 말씀 이탈의 원인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다.

말씀 이탈의 원인

첫째로, 효과와 성취 최우선의 생활 원리 곧 실용주의를 꼽을 수 있습니다. 효과와 성취, 성공과 번영을 최고의 가치 판단의 기준으로 삼고 사는 것이야말로 말씀 이탈을 부추기고 보편화하는 가장 근본적인 원인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러한 철학은 기복 신앙과 번영 신학이 자리를 잡을 둥지를 제공합니다. 철저한 실용주의에 입각한 생활에서는 현재는 언제나 무엇인가를 성취하여 의미 있는 것이 되거나, 아니면 아무런 결과를 만들어내지 못하여 헛것이 되어버리는 차원에서만 존재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현재는 언제나 수단이 될 뿐, 그 자체로 의미를 갖거나 가치를 갖고 존재하지 못하게 됩니다. 이러한 생활 태도는 말씀보다는 효과 있는 프로그램과 행사 위주의 신앙 활동 혹은 교회 활동으로 이끄는 부작용을 만들어냅니다.

둘째로, 세속 정치와 사회의 흐름에 편승하는 것 곧 세속주의입니다. 세속화란 한마디로 말하면 하나님 지향성에서 인간 지향성으로 전환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인간 지향성은 필연적으로 극도의 자기중심성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한국교회가 어떻게 세속정치와 사회의 흐름에 편승하여 세속화의 길을 가게 되었는가의 일단은 한국교회가 놀랄만한 양적 성장을 구가하게 된 역사적 배경을 살펴봄으로써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1960년대 이후 80년대 초반에 이르는 기간, 한국 사회의 최대의 관심은 경제 성장이었습니다. 한국 정치와 사회는 경제 성장을 최고의 가치로 삼고 그것을 위해서라면 인권 탄압과 노동 착취 등의 부작용을 개의치 않고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였습니다. 그 결과로 한국 사회는 비약적인 경제 성장을 이루었습니다. 이러한 정치, 사회적 흐름에 편승하여 이 시대의 교회가 심혈을 기울인 것도 곧 교회의 성장이었습니다. 이 기간 동안 한국교회는 교회 성장을 최고의 목표로 삼고 그를 위해서는 모든 수단을 동원하는 흐름을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한국교회는 세계 교회가 놀랄 정도로 급성장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교회 성장에 결정적인 역할을 감당한 것이 강단의 설교였습니다. 교회 성장을 최고의 목표로 삼고 있는 목회자들의 설교는 자연히 사람들이 듣고 싶어하는 설교에 집착하게 되었습니다. 축복 중심의 기복적 설교가 이 시기에 극성을 부리기 시작한 것은 이러한 연유에서였습니다. 소위 부와 건강, 그리고 성공의 복음이 강단 설교의 주를 이루게 된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샤머니즘이라는 문화적 배경 때문에 기복적이고 주술적인 경향을 띨 위험을 안고 있는 한국교회 설교는 이러한 역사적 상황에서 더욱 쉽게 기복적인 성격의 설교로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설교는 본문을 심도 있게 해석하고 그로부터 얻은 메시지를 선포하기보다는 교인들이나 설교자의 기복적 기대를 충족시키는 데 초점이 맞추어진 설교로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즉 설교의 본문 이탈과 설교에서의 본문의 침묵 현상이 초래된 것입니다. 그러나 놀라운 양적 성장을 구가하게 된 한국교회는 80년대 중반을 전환점으로 양적 성장의 침체기로 돌아섰습니다. 물론 이 시기에 교회의 질적 성장을 강조하면서 성경으로 돌아가야 된다는 주장이 일부에서 제기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전반적인 흐름은 침체되고 있는 양적 성장의 문제를 극복하기 위하여 사람들이 교회로 나아오게 하거나 최소한 교회를 떠나지 않도록 붙잡아두는 데 초점이 맞추어진 설교에 집중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한 흐름은 여전히 설교를 본문 이탈 혹은 설교에서 본문의 침묵에 머물러있게 하는 결과를 초래하였습니다. 이러한 사실로부터 내려지는 결론은 교회가 수적 성장을 최우선의 목표로 삼고 있는 한 교회의 성장기이든지 침체기이든지 설교는 공통적으로 본문 말씀의 충실한 선포로부터 이탈하여 청중의 요구와 타협하거나, 기복적 축복의 메시지에 치중하거나 하여 소위 부와 건강과 성공의 복음을 선

포하는 설교로 나아가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셋째로, 청중의 왜곡된 필요를 충족시키려는 것에 대한 집착을 들 수 있습니다. 설교의 본문 이탈 현상이 보편화된 근저에는 설교자의 설교의 기능에 대한 잘못된 철학과 설교의 대상인 회중(congregation)에 대한 잘못된 태도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는 먼저, 설교는 청중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이어야 한다는 설교의 기능에 대한 편협한 이해입니다. 물론 설교는 청중의 필요를 충족시켜 주어야 합니다. 설교자는 청중의 필요에 민감해야 합니다. 설교자가 청중의 필요에 무관심하면, 그는 자기의 필요를 따라 설교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말이 청중이 필요하다고 하는 것이면 그것이 무엇이든지 충족시켜주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청중의 필요에는 그들이 요구하는 필요(Expressed Need)가 있는가 하면, 그들에게 실제로 필요한 필요(Actual Need)가 있습니다.9) 그리고 양자가 일치하는 경우도 있지만 많은 경우에 서로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 맹장수술 후 통증을 견딜 수 없어서 진통제 주사를 놓아달라고 소리치는 환자가 있을 때, 진정한 의사라면 그에게 진통제 주사를 처방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빨리 일어나서 복도를 걷는 운동을 하라고 등을 치며 운동을 재촉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장유착 현상이 일어나 다시 수술할 수도 있다고 말할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청중의 필요로부터, 또는 청중으로부터 설교를 시작하라는 말은 그 내용에 분명한 한계를 부여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청중의 현상학적 요구가 언제나 설교를 지배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특히 기복적인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축복 위주의 설교를 삼가야 합니다.

다음으로 설교의 대상인 회중에 대한 왜곡된 태도입니다. 이것은 현대 교회의 교인관이 고객관을 근거로 형성됨으로 말미암은 데서 오는 귀결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오늘날 목회현장에서는 전통적인 교회관이 현대의 기업관으로 대체되고, 목회자관은 최고 경영자 곧 CEO관으로 대체되고, 교인관은 고객관으로 대체되는 대변질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교인들을 최대의 서비스로 편안히 모셔야 되는 고객관에 입각하여 대하게 되면 설교에서는 청중의 독재(Audience’s Dictatorship) 현상이 초래되고, 설교는 청중의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도구로 전락하게 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행해지는 설교에서는 필연적으로 본문의 침묵이 강요될 수 밖에 없습니다.

넷째로, 부담을 주지 않는 재미있는 설교를 추구하는 데 그 원인이 있습니다. 우리의 설교가 쉽고 재미있는 설교, 편안하고 부담이 없는 설교, 실용성 있는 설교라야 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설교의 궁극적인 목적과 가치로 여기고 그것을 위하여 스스럼없이 본문을 이탈하는 설교로 가는 것은 잘못입니다. 그런데도 오늘날 설교 강단에서 나타나고 있는 이러한 현상은 설교에 대한 교인들의 요구와 그에 부응하려는 설교자들의 반응이 만들어낸 결과입니다. 설교는 점점 오락성을 중요하게 여기게 되고, 청중이 편안하게 들을 수 있게 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설교는 알지 못하는 사이에 오락 도구로 전락하고, 엔터테인먼트 수단으로 변질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설교에는 심각한 후유증이 수반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75세 된 노인이 한 다음과 같은 말을 귀담아 들어봐야 합니다. “저는 그동안 장OO 목사님의 설교가 하도 재미있어서 TV에서 자주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성경 말씀을 확실하게 전해주는 다른 분의 설교를 듣고서야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내가 지금까지 들은 그 설교들은 재미는 있는데 듣고 나서 남는 게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 말씀을 확실히 전해주는 설교는 듣고 나서는 마음에 남는 게 있어요.” 물론 듣기에 재미있는 설교와 마음에 남는 게 있는 설교가 언제나 대립 관계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재미에 우선을 두는 설교는 남는 게 없는 설교로 전락할 위험을 안고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언제라도 청중을 재미있게 해주려는 오락성이 본문이 요구하는 중요한 메시지를 대체해버릴 수 있습니다.

다섯째는 “쉬운 설교”에 대한 잘못된 이해가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물론 설교는 쉬워야 합니다. 그러나 쉬운 설교란 내용이 없어서 긴장감을 주지 않는 설교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 편히즐길 수 있는 오락성으로 채워진 설교를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본문의 말씀을 생략하고, 재미있거나 심금을 울리는 다른 이야기나 행사로 대체하는 것을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KBS TV의 개그콘서트 프로그램이나 다른 예능 프로에 내보내도 손색이 없을 웃음을 자아내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진 설교도, 긍정의 힘이 본문 역할을 하는 자기 최면성 심리 작용을 부추기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진 설교도, 밑도 끝도 없는 위로와 격려의 메시지를 쏟아내어 아멘을 불러일으켜서 카타르시스를 유발하여 속을 후련하게 해주려는 데 초점이 맞추어진 설교도, 모두 본문 이탈 현상으로 나아갈 위험한 일이라는 사실을 설교자도 청중도 명심해야 합니다. 쉬운 설교란 내용이 없어서 쉬운 것이 아니라, 심오한 성경의 가르침이 오늘날 청중들의 언어로, 그리고 설득력 있는 전개로 잘 전달되게 하는 설교를 말하는 것입니다. 즉 쉬운 설교란 내용의 문제가 아니라, 전달 방식의 문제임을 오해하지 않아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설교는 본문의 말씀과 청중을 맞닥뜨리게 하는 것을 그본질로 한다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여섯째로, 말씀의 충족성에 대한 불신입니다. 설교의 본문 이탈을 부추기는 또 하나의 요인은 “말씀만으로는 안 된다”는 설교자의 의식입니다. 이것은 말씀의 충족성에 대한 불신입니다. 말씀만으로는 안 된다는 말은 그 안에 여러 가지 근거를 담고 있습니다. 목회에는 말씀 외에 다양한 변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말씀으로는 사람이 잘 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혹은 말씀만 가지고는 교인들을 만족시킬 수 없고, 교인들이 모이지 않는다고도 합니다. 혹은 설교는 그래도 남 못지않게 하는데, 목회가 잘 안 되는 것을 보면 말씀에 집착하는 설교만 가지고는 안 되는 것이 분명하다고도 합니다. 논리를 내세운 것이건, 자신의 경험을 내세운 것이건, 혹은 문화적, 사회적 현실 인식을 근거로 한 것이건, 그러한 명분의 근저에 공통적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은 말씀의 충족성에 대한 불신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곳저곳으로 흩어져서 현실적으로는 핍박받는 나그네의 고된 삶을 살아가는 그 시대의 신앙인들에게 여전히 말씀이 최고라고 강조합니다. 거듭나게 된 것도, 영혼을 깨끗하게 한것도, 형제를 사랑하는 것으로 요약된 이 땅에서의 신자다운 삶을 살 수 있는 근거도, 다 말씀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라고 사도는 단언합니다. 그 말씀은 살아있고 항상 있으며 세세토록 있으며, 이 말씀이 우리의 모든 것이라고 강조합니다(벧전 1장). 말씀만으로는 안 되니 현실적인 필요를 위해서 이런 저런 다른 것들을 붙잡으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사실은 현실이 어려울수록 더욱, 살아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최우선에 놓고 집착하는 데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하는 셈입니다. 사도 바울도 디모데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를 마무리하면서 하는 말은 “말씀을 선포하라”(Preach the Word)는 한마디였습니다(딤후 4:1-4). 이것은 하나님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그리고 그분의 재림과 그의 나라를 내세운 엄중한 명령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죽음을 의식하는 사람이(6절)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내놓는 마지막 간곡한 부탁이었습니다. 사도가 그렇게 엄중한 명령과 간곡한 부탁으로 “말씀을 선포하라”고 하는 중요한 이유는 “이 세대가 말씀 듣는 것을 싫어하고, 사욕을 채워줄 거짓 선생들을 찾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었습니다(3절). 이 세대가 부담스러워하고, 이 시대의 흐름에 맞지 않는 말씀을 설교하지 말아야 한다는 우리의 생각과는 정반대의 논리를 사도는 펴고 있는 것입니다. 청중이 말씀 듣는 것을 싫어하니 그들이 원하는 것을 하는 것으로 돌파구를 찾는 것은 잘못입니다. 설교자의 말씀 준비와 열성이 충분하지 않은 것을 인정하지 않고, 말씀 자체가 충족하지 않아서 문제인 것처럼 생각하게 되면, 그의 설교에서는 자연히 본문 말씀이 침묵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해마다 여름이 오면 수련회나 캠프를 준비하느라 쩔쩔매는 사역자들을 보며 그 열정에 고마운 마음과 그 힘들어하는 모습에 안타까운 마음이 나를 사로잡곤 합니다. 적은 예산으로 어떻게 해서든지 아이들이 많이 모일 수 있는 재미있고 기발한 프로그램들을 준비하려고 이리 뛰고 저리 뛰는 모습들이 때로는 너무 안쓰럽기도 합니다. 그러나 지금 한국 사회에서는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는 몇몇 초대형 교회들을 제외하고는 어느 교회도 아이들이 교회 밖어디에선가 누리는 재미보다 더 재미있는 프로그램을 교회 안에서 제공하여 아이들을 교회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재정적으로도 불가능하고, 인력으로도 불가능합니다. 단순히 재미있기 위해서라면 아이들이 굳이 교회 수련회에 올 이유가 없는 상황입니다. 많은 아이들이 재미는 자기들만 통하는 다른 곳에서 누리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몇 년 전부터 교육부서 사역을 하는 제자들에게 간간이 권면하는 것이 있습니다. 담임 목사님과 진지하게 말씀을 나누어, 당분간 부서에 아이들이 상당수 감소한다 할지라도 교육부서의 수련회에서 모든 다른 오락성 프로그램을 없애버리고 성경수련회 혹은 성경 캠프로 운영하는 모험을 시도해보라는 제안입니다. 어차피 아이들의 기대나 현실을 충족시키지 못할 것이라면 게임, 오락, 체험 등은 다른 곳에서 즐기라고 하고, 교회 수련회에서는 2-3일 동안 오직 성경만을 집중적으로 가르치고 나누고 발표하고 그리고 힘을 다하여 기도하는 방식으로 진행하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담당 교역자가 기도 준비와 교재 준비 그리고 말씀 준비를 치열하게 할 것을 전제로 합니다. 시도해보니아이들이 의외로 좋아하고 은혜를 받는다는 보고를 간혹 듣곤 합니다. 각 교육부서에서 “다니엘서 성경 수련회” “요한복음 성경 캠프” 등으로 이름 붙인 수련회나 캠프로 여름 행사를 바꾸는 운동을 제안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교회들도 이제는 앞에 “특별” 자를 붙인 무슨 무슨 집회나 이벤트보다는 차라리 “출애굽기 성경 집회” “하박국서 성경 집회” 등으로 이름 붙여진 성경 집회(Bible Conference)로 교회 행사들을 진행하는 운동을 제안하고 싶습니다. 이벤트 준비와 프로그램 진행을 위하여 쏟는 그 열정과 그 헌신과 그 수고를 말씀 연구와 준비와 실천에 쏟을 수만 있다면 이런 캠프나 집회도 반드시 성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결국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살린다는 진리를 무시하지 않아야 합니다. 사도 베드로의 말씀처럼, 우리를 살리는 “살아 있고 세세토록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일곱째로, 본문에 대한 집착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설교가 본문에 집착한다는 말은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청중이 이해하게 하고, 본문이 의도하는 것을 청중이 행하게 하려는 데 집중하는 설교를 말합니다. 설교가 본문에 집착하지 않게 된 데는 본문과 심도있게 씨름을 하지 않는 설교자의 게으름과 쉽고 편하고 부담 없는 설교를 원하는 교인들의 변절이 중요한 원인입니다. 그런가 하면, 본문 접근과 해석에 대한 잘못된 굳어진 습관에 젖어서 본문을 잘 다루지 못하는 것이 원인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동안 확산해온 설교에 대한 잘못된 이해 등이 그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설교 자료의 범람이 아이러니컬하게도 본문을 이탈하게 하는 설교를 양산해 내게 하는 역기능을 가져오기도 하였습니다. 설교준비가 넘치는 설교 자료들을 의존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면서 본문에 대한 집중적인 탐구와 그렇게 하여 얻은 본문의 말씀을 설교하는 대신, 설교 자료가 제공하는 예화나 주제, 대지 등을 그대로 설교의 내용으로 사용하면서 실제적으로는 본문이 배제되는 현상을 초래한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설교자들의 설교 횟수가 지나치게 많은 것도 설교자들로 하여금 본문을 이탈하는 설교를 하게 한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한 주간에 8-10회 정도의 설교를 감당하면서 본문을 철저하게 연구하고 그래서 얻은 내용을 가지고 모든 설교를 하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여덟째로, 설교 주제의 편향성입니다. 다시 말해 설교자의 신학적, 신앙적 취향이나 목회적 필요에 대한 집착이 문제입니다. 설교의 주제가 편향적으로 선정되는 요인은 다양합니다. 설교자의 신학적 취향과 신앙적 기호에 집착하여 설교를 할 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설교의 주제들은 편향성을 띠게 됩니다. 설교자는 하나님 나라, 언약, 구속사 등 신학적 주제나 혹은 전도, 헌신, 기도 등 설교자가 자신이 있거나 혹은 심취해 있는 신앙의 주제들을 설교하기에 좋은 본문들을 위주로 설교하기 쉽습니다. 특정의 주제에 대한 집착이 더욱 심해지면, 어떤 본문을 내세우든지 결국 그 주제로 결론을 내리는 방식의 설교를 수행하게 됩니다. 이런 경우 교인들은, “우리 목사님은 어떤 본문을 택하든지 결국은 그 말씀이야!”라고 말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설교의 편향성은 이렇게 한두 주제에 편중하여 다른 주제들을 다루지 않는 방식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같은 주제에 대하여도 성경이 그 주제를 제시하는 다양한 측면들을 파악하여 균형 있게 그 주제를 제시하지 않음으로써 설교가 편향성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기도를 주제로 설교하면서 언제나 기도를 설교할 때는 기도를 열심히 해야 한다거나, 혹은 기도를 하면 응답의 복을 받는다는 등 성경이 기도에 대하여 가르치는 내용 가운데 설교자의 취향에 맞는 일부 측면만 강조할 뿐, 기도에 대하여 그 본문이 말씀하는 기도에 대한 메시지를 설교하지 않음으로써 편향적인 설교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경우 교인들은 “우리 목사님은 기도를 주제로 설교하면 언제나 그말씀이야!”라고 말하게 됩니다. “우리 목사님의 하나님에 대한 설교는 언제나 우리에게 잘해주시는 좋으신 하나님이야!”라는 식입니다.

마지막으로, 설교자의 영성 상실을 들 수 있습니다. 설교자들이 전통적으로 교인들 심지어는 그가 속해있는 사회로부터도 받았던 존경과 신뢰를 지금도 받고 있는가라는 관점에서 현대 한국교회 목회자가 처하여 있는 상황을 살펴볼 때 그 대답은 부정적이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영적 지도자, 영적 스승, 일반인들과는 다른 차원의 가치관과 자존심을 갖고 사는 믿을 만한 이들, 일반인들이 미치지 못하는 영역에 속하여 있는 지도자 등으로 지칭되면서, 영적 신뢰와 존경을 받거나 최소한 그 인격을 인정받는 시대는 더 이상 아니라는 것은 이미 앞에서 한국교회가 처한 위기상황에서도 언급한 바 있습니다. 오히려 불신과 비난을 사회로부터 받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더욱이 교회 안에서도 교인들로부터 깊은 영적 신뢰를 확보하고 영적으로 의존하고 싶은 지도자의 위치를 점점 상실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초래한 요인은 다양합니다. 교인들의 의식이나 성품이 잘못되어 그럴 수도 있습니다. 모든 권위적인 것을 거부하는 이 시대 문화의 영향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결정적인 원인 가운데 하나는 설교자들의 개인 영성의 상실 혹은 영성의 피폐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설교자의 영성의 상실 혹은 영성의 피폐화와 설교의 말씀 이탈 현상은 악순환의 고리로 연결되어 있기도 합니다. 본문 말씀을 제대로 전하지 않고 본문을 이탈하는 설교를 하다 보니 본인의 영성이 진보할 수가 없고, 설교자의 영성이 피폐화되니 하나님의 말씀에 집착하고 그 말씀으로부터 메시지를 선포하는 일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는 악순환이 반복됩니다. 사실, 설교가 본문에서 이탈함으로써 성도들에게 나타나는 후유증은 설교자 자신에게도 그대로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현상이 빚어지는 중요한 요인 가운데 하나는 목회자들이 너무 분주하고 바쁘게 사는 목회 패턴에도 있습니다. 그러면 말씀 이탈로 어떤 결과들이 초래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말씀 이탈이 초래하는 결과

무엇보다도 먼저 성도들의 성경 문맹 현상이 일어납니다. 역사적으로 성도들의 성경 문맹 현상이 가장 극심했던 때는 중세 시대입니다. 중세 시대에는 사제들만 성경을 소유할 수 있고, 성경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평신도가 성경을 소유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할 뿐 아니라, 불법이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설교는 신도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가와 상관없이 반드시 라틴어로만 행해져야 했습니다. 라틴어를 읽을 줄도, 말할 줄도 모르는 사제들도 라틴어로만 설교를 해야 했습니다. 신도들은 성경이 아니라, 교회가 해주는 말씀만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이 성경 말씀이라고 믿어야 했습니다. 교회만 성경을 가질 수 있고, 교회가 하는 설교는 성경 말씀이라고 믿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 시대의 신도들은 실제로 성경에 대하여 는 문맹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종교개혁이 가능하게 한 가장 큰 요인은 성경을 신도들에게 돌려주었다는 점일 것입니다. 성경에 눈이 뜨이게 한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에서는 누구나 자기의 언어로 된 성경을 얼마든지 가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말로 행해지는 설교를 얼마든지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설교자들이 성경 말씀을 말해주지 않기 때문에 결국 성경에 대하여 문맹이 되는 아이러니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중세 교회는 성경 말씀을 갖지 못하게 하고 알아듣지 못하게 하여 신도들을 성경 문맹자들로 만들었다면, 오늘날은 설교자들이 성경 말씀을 말해주지 않아서 교인들이 성경에 대하여 문맹이 되고 있습니다. 더욱이 근래에는 성경의 내용에 대하여 문맹이 되게 할 뿐 아니라, 교인들에게는 성경책 자체가 낯설게 하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습니다. 지금은 교인이 몇 사람만 모이는 개척교회도 화면에 설교 본문과 설교 중 인용하는 모든 성경 구절을 띄워주는 것이 보편화되고 있습니다. 이것이 주는 유익도 있습니다. 교인들로 성경을 찾게 하느라 설교의 흐름을 단절시키는 일 없이 성경을 인용하며 설교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설교 시간과 예배 시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성경 구절을 화면에 띄워주는 친절함과 편의를 제공하는 과잉 친절의 결과로 말미암아, 성도들은 점점 성경책이 낯설어지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화면에 띄워주는 글자만 따라 읽으면 되다 보니, 신앙생활을 오래하여 나름대로 성경에 대한 상식을 갖추게 된 경우나, 혹은 교회에서 설교와 별도로 제자 훈련이나 성경 공부 그룹 혹은 성경 읽기 그룹에 속하여 훈련을 받는 교인 외에는 성경 어느 책이 어디에 나오는지 순서도 모르고, 앞뒤의 문맥을 알아갈 기회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제 막 신앙생활을 시작한 초신자가 곧바로 교회의 성경 공부 그룹에 참여하여 성경을 전체적으로 배우는 경우는 흔하지 않습니다. 회심하고 처음 교회 출석을 한이후 오랜 세월 동안 성경책 한번 찾아볼 기회도 없고 앞뒤를 살펴볼 기회도 없이 그렇게 교인 생활을 하는 사람은 세월이 지난 후에도 성경이 낯선 책이 될 것이 확실합니다.

둘째는 성도들이 일상의 삶과 교회 안에서의 생활에서 신앙적인 분별력을 가질 수 없게 된다는 점입니다. 즉 신자다운 판단과 행동을 할 근거를 갖지 못하게 되어 신앙의 원리에 따른 신자로서 처신을 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결국 각각 제 소견에 옳은 대로 판단하고 처신하는 길을 가게 되지요. 이러한 현상이 교회 안팎에서 빚어내는 한국교회의 부정적인 현상은 이미 심각한 상태입니다. 성경에는 문맹이라고 할 만큼 성경에 익숙하지 못한 사람이 일상의 삶과 교회 안의 생활에서 신앙적인 분별력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은 필연적인 결과입니다. 그러니 매사를 신앙적인 원리와 분별을 기준으로 판단하고 처신하지 않게 됩니다. 이것은 신자 개인의 삶을 위해서는 물론, 목회자의 목회를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은 일입니다. 교회가 어려운 문제에 부딪혀 분쟁이 일어날 때 교인들은 성경의 원리에 따라 처신하지 않고, 각자의 소견에 옳은 대로 처신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교회는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지게 되지요. 또한 이단의 유혹이나 공격에 대하여도 스스로의 판단으로 대 비하지 못하고 쉽게 유혹에 빠지게 됩니다. 실례로 근래에 한국 교계를 극심하게 어지럽히고 있는 신천지 이단은 성경으로 말한다는 미명 아래 터무니없는 황당한 성경 해석을 들이밀고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교인들이 오히려 그것을 심오한 말씀이라며 쉽게 휘말리고 있습니다. 신앙적이고 성경적인 분별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인들이 성경적인 분별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는 가장 큰 원인은 성경 본문을 말하는 설교를 듣지 못했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성경이 교회의 각종 의식에서 사라져감으로써 현대 교회와 성경이 제시하는 원래의 교회와 현실 교회 사이의 연속성이 약화되거나 심지어 단절되어 오늘날의 교회가 원래 교회가 존재하게 하였던 말씀이나 교회의 유일한 존재 목적을 더 이상 기억하지 못하게 되어버리는 것이 가장 절박한 문제라는 제임스 스마트(James D. Smart)의 지적은 현대 교회에 대한 정당한 우려입니다.10)

셋째로, 겉으로 표현을 하지 않고 있을 뿐, 강단 아래 앉아서 설교를 듣는 교인들 가운데는 강단으로부터 방금 낭독된 그 말씀을 듣고자 하는 기대가 충족되지 않고 있는 현실에 대하여 심한 불만과 강단에 대한 불신이 끓어오르고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설교자가 강단에서 본문 말씀을 낭독하는 것은, 그 말씀을 설교하겠다는 공적인 약속입니다. 강단 아래의 교인들은 무엇보다도 먼저 그 약속이 지켜지기를 기다립니다. 강단 아래의 교인들이 설교자들에게 쏟아내는 불만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설교가 본문 말씀을 말하지 않는다는 불만이고, 둘째는 설교자 자신은 설교한 대로 전혀 살지 않는다는 불만이며, 그리고 셋째는 설교자가 설교한 대로 목회하지 않는다는 불만입니다. 강단 아래의 신자들은 방금 읽은 그 성경 본문을 설교하는 설교자, 그리고 그의 일상의 삶이 강단의 설교를 배반하지 않고, 강단의 설교가 그의 삶을 조롱하지 않는 설교자를 보고 싶어 합니다.

넷째는 교회 안에 일 중독자들을 양산하는 것입니다. 본문의 말씀을 충실하게 말해주지 않는 설교에 실망한 교인들이 자기의 신앙을 지켜야 한다며 자구책으로 내리는 결론은 교회의 일을 열심히 하는 것입니다. “설교가 어떠한가 하는 것이 뭐 그리 중요하냐. 다 옳은 말씀이니 한마디라도 순종하고 지키는 것이 중요하지. 설교와 상관없이 결국 하나님 앞에서 내 신앙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지”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하여 내리는 결론이 열

심히 교회의 일에 충성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설교에서 성경 말씀의 침묵은 교인들로 하여금 급속히 하나님을 섬기는 일로부터 교회 자체와 교인 자신들을 섬기는 일로 돌아서버리게 하는 결과를 초래합니다.11) 그리하여 교회의 일을 열심히 하는 것 자체가 자기의 신앙을 지키는 방편이 됩니다. 그리고 열심히 교회에서 봉사하고 있다는 사실이 자기가 하나님 앞에서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안심하는 증거가 되기 시작하지요. 신앙의 성숙과 인격의 성화에 대한 말씀의 척도가 없어진 교인들은 신앙의 덕목으로 내세워지는 다양한 방식의 행위 곧 교회의 일을 척도로 자신의 신앙을 검증하고 확인하며 스스로 위안을 삼는 데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리하여 열심히 일을 하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되는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그 사람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점점 일 중독자가 되어갑니다. 그러므로 본문의 말씀을 설교하여 교인들에게 은혜를 끼치지 않는 설교자들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만들어내는 치명적인 결과는 교인들을 일 중독자로 내모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단에 대한 무방비입니다. 성경의 진리를 설교하는 데 실패할 경우 신자들 가운데서 이단이 활개를 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은 현장에서 우리가 확인하고 있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앞에서도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근래에 한국교회에 가장 큰 폐해를 끼치며 주목을 받고 있는 신천지 이단은 황당한 본문해석과 이만희 중심의 어이없는 교리를 주장하는 대표적인 집단입니다. 그런데도 수많은 기존의 정통 교회의 교인들이 신천지 이단에 끌려들어가고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오히려 신천지에서 들은 내용을 가지고 기존의 정통 교회에서는 들어보지 못한 심오하고 깊이 있고 철저하게 성경중심적인 설교라고 당당히 주장을 합니다. 이렇게 기존의 교인들이 이 이단의 미혹에 쉽사리 빠져 들어가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교회 예배와 봉사에 열심히 참석하던 교인들이 어느 날 갑자기 신천지 이단에 모든 것을 바치며 헌신하는 데로 가버리는 현실이 정통 교회의 설교와 설교자에게 던지는 도전이 무엇인가요? 신자들이 어느 가르침이 성경적인지 반성경적인지를 분별할 수 없는 허약한 체질이 되어버린 근본적인 원인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요? 그들의 개인적인 무책임과 무지함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그들이 그동안 교회와 신자의 정체성을 확립하여 어떤 가르침이나 주장에 대한 신학적, 성경적 분별력을 행사할 수 있을 정도로 자라가게 하는 설교를 듣지 못하며 교인 생활을 해온 데에 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리고 그것은 전적으로 기존 교회의 설교와 설교자들의 책임이라고 해야 되지 않을까요? 그러므로 신천지 이단에 대한 대응은 설교자들이 성경을 제대로 설교하며, 교회와 신자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에 목적을 둔 설교를 소홀히 해왔다는 반성으로부터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이만희 씨가 그렇게 황당한 알레고리 해석과 억지 해석 그리고 말도 안되는 자의적 해석을 일삼는데도 오랫동안 신앙생활한 정통 교회의 신자가 아무런 이질감도 느끼지 않으면서 오히려 그것을 기존 교회 목사에게서는 들어보지 못한 심오한 성경 중심 설교라고 좋아하는 것은, 아마도 그들이 기존 교회에서 그러한 알레고리 해석과 자의적 해석 등에 익숙해 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신자로 신자되게, 교회로 교회되게!

성경적 교회관의 확립

위에서 제시한 것과 같은 위기 상황을 극복하는 가장 간략하고 확고한 일차적 해결책은 교회란 무엇인가를 철저하게 다시 확인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성경적 정체성을 재확인하고 회복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당연히 신자란 누구인가라는 문제를 포함합니다. 그동안 우리가 저지른 가장 큰 실수는 교회관의 변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교회관은 기업관으로, 목회자관은 CEO관으로, 교인관은 고객관으로, 예배관은 공연관으로, 예배 회중관은 공연 관람객관으로 변질시켜온 것입니다. 교회는 회사처럼 되고, 교인은 관객과 고객처럼 되고, 예배는 기획된 공연물처럼 되고, 목회자는 사장님처럼 되고, 당회는 중역회의처럼 되어버린 데에 한국교회의 가장 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급히 다시 확인하고 회복해야 될 것은 성경적 교회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철저하게 재확인하고, 그에 따라서 우리의 생각과 판단과 우선순위를 전환해야 합니다. 이것이 다름 아닌 정체성의 확립입니다.

말씀으로 돌아가라

둘째는 철저하게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말씀이탈과 말씀 상실의 상황, 강단에서 말씀의 침묵과 교회에서 하나님의 침묵이라는 비극적 상황을 벗어나야 합니다. 사실 정체성을 확인하는 근거는 성경 말씀입니다. 말씀을 떠난 어디서도 우리는 신자에 대하여, 교회에 대하여 정체성을 확인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과 관계가 깊어지는 가장 확실한 방편은 그의 말씀을 읽고 듣고 알고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의 첫

마디도 말세를 사는 신자에게 가장 중요하고 가장 가치 있는 복은계시의 말씀을 읽고 듣고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행하는 자라는 선언으로 시작하고 있지 않습니까! 말씀 이탈의 주도적인 역할을 한 곳이 강단이었다는 점을 의식한다면, 말씀으로 돌아가는 일도 강단이 주도가 되어 앞장서야 합니다. 아모스 선지자가 그렇게 처절하게 지적했던 말씀의 기갈은 바로 오늘날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것과 같은 시대를 두고 한 말씀일지도 모릅니다. 성경책은 어디에나 나뒹굴고 있는데, 정작 그 안에 주신 하나님의 말씀은 들을 수 없는 시대를 우리가 만들고 있는지 모릅니다. 강단에서 말씀의 회복과 말씀의 부흥이 이 시대를 사는 우리의 급선무입니다.

성경적 설교란 무엇보다도 성경 본문을 선포하는 설교를 말합니다. 본문을 충분히 드러내어 제시하는 강해 설교가 강단에서 회복되는 것이 필요합니다. 본문을 청중의 기복적이고 실용성 우선의 개인적 욕구 충족을 기준으로 풀어내는 것을 지양하고 성경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흐름인 구속사적 혹은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원리에 충실하도록 풀어내는 설교를 회복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동시에 그동안 개인적인 차원에만 집중하여 온 설교에서 신앙공동체를 세우는 차원의 설교로 범위를 넓혀야 합니다. 구속사의 궁극적 지향점도 하나님과 신자 개인의 차원이 아니라 구속받은 자들이 이루는 신앙 공동체를 통한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것을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지 않아야 합니다. 사실 그동안 우리의 설교나 신앙적 관심은 지나치게 신자들과 하나님의 개인적 관계문제에 집중되어 왔다는 반성이 필요합니다. 위와 같은 점을 반영한 설교의 갱신이 바로 성경적 설교의 회복일 것입니다.

말씀 순종

순종은 하나님에 대한 절대 신뢰가 맺어내는 열매입니다. 하나님께서 순종을 그렇게 원하시고 또 기뻐하시는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의 순종을 통하여 덕을 보시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그렇게 신뢰하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헌신이 사랑이 만들어내는 열매라면, 순종은 믿음이 만들어내는 열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헌신과 사랑을 그렇게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성취를 도와주는 도구나 수단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우리의 목적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말씀대로 사는 것이야말로 결국 신자가 신자답게 되고, 교회가 교회답게 되는 유일한 길입니다. 이것은 현실적으로 많은 고난을 감수해야 되는 일입니다. 그러나 신자와 교회의 진정한 능력과 영광이 거기에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초창기 한국교회의 성경 중심적 성격의 회복

한국 기독교의 가장 두드러진 특성 가운데 하나는 외국 선교사가 입국하기 전에 이미 성경이 먼저 번역되고 보급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개신교 선교사가 최초로 한국에 들어온 것은 1884년이었습니다. 그러나 한국어 성경 번역은 그 이전에 만주를 중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후에 일본에서도 이루어졌지요. 만주에서 는 존 로스(John Ross, 1842-1915)와 존 매킨타이어(John McIntyre, 1837-1905)가 주도하고, 이응찬, 김진기, 이성하, 백홍준, 서상륜 등 한국인 번역자들이 합세하여 이루어졌습니다. 1882년에 누가복음 인쇄, 1883년에 마태복음과 마가복음과 사도행전을 인쇄, 1887년에 신약 전체를 번역하여 3천부를 출판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로스 번역본”(Ross Version)입니다. 일본에서는 이수정이 누가복음을 번역하였고, 1885년 초에 미국성서공회에서 1천부의 번역판을 인쇄하였습니다. 만주에서 성경 번역에 참여한 한국인 번역자들은 그 이후 성경을 국내에 들여와 보급할 뿐 아니라, 성경 말씀(복음)을 전하는 일에도 힘을 기울였습니다. 예를 들어, 1883년에 서상륜은 위험을 무릅쓰고 새로 번역된 복음서 성경을 한국으로 가져왔으며, 1884년에는 6천부를 들여와 여러 지방으로 다니면서 배포하였습니다.12) 영국성서공회 한국지부가 1896-1940년까지 한국에서 반포한 성경은 총 2,062만여 권으로 이는 매년 458,255권이 반포된 셈이며, 미국성서공회 한국지부가 1901-1919년까지 한국에서 반포한 것은 총 266만 권으로 매년 140,455권을 반포한 셈입니다.13)

한국의 성경 반포 사업이 그렇게 활발하게 일어나게 된 데는 권서(colporteur)들의 활동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권서는 성서공회 혹은 선교사의 감독을 받으며 성경을 판매, 보급하는 활동을 맡았던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성경을 짊어지고 전국 방방곡곡으로 돌아다니며 그것을 보급하고, 그 내용을 전하기에 희생적으로 헌신했던 이들입니다.14) 1940년까지 영국성서공회 한국지부는 성경 보급의 약 85%를 권서들에 의존하였고, 1913-1918년의 미국 성서공회 한국지부 성경 보급의 약 98%도 권서에 의해 이뤄졌습니다.15) 일본을 거쳐 한국으로 찾아온 초대 선교사들은 이미 번역된 복음서를 들고 입국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실들은 선교사들이 도착하자마자 곧 사역의 열매를 거둘 수 있을 만큼 선교의 준비 작업이 진행되고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16) 성경 번역과 보급으로 말미암아 한국 최초의 개신교 신자들은 처음부터 자기의 언어로 직접 성경 말씀을 접할 수 있었습니다. 성경을 가지고 전도하며, 교육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성경은 한국교회 역사의 첫 순간부터 매우 중요하고도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사실은 한국 기독교가 성경 중심의 성격을 가진 기독교로 정착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습니다. 선교사들이 도착하자마자 곧 사역의 열매를 거둘 수 있었던 것도, 이후의 한국교회가 그렇게 지독한 핍박 가운데서 그렇게 힘찬 성장을 이룰 수 있었던 것도 성경 중심의 그 체질 때문이었습니다. 성경이 한국교회에서 차지하는 독특한 위치를 목도한 선교사들은 한국 기독교인들을 “성경을 사랑하는 그리스도인”(Bible-loving Christian) 혹은 “성경을 사랑하는 사람들”(Bible Lovers)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한국의 기독교를 “성경기독교”(Bible Christianity)로 지칭하곤 하였습니다.17) 선교사들은 당시 한국교회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러한 상황을 주목하면서 이렇게 언급하였습니다.

이 땅에서 발전되고 있는 기독교는 출중하게도 성경기독교이다. 복음전도자들이 전도하기 위해 가져가는 것은 성경이다. 믿어지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그것에 의해 사람들이 구원받고 있다. 한국 기독교인들이 매일 먹고 마시는 양식은 성경이다. ……성경은 이 땅에 사는 수많은 사람들의 정신적이고 영적인 자양분 중에서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18)

성경이 광범하게 반포되자 한국의 초대 기독교 공동체에서는 성경을 읽기 위해서 ‘국문 공부’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뒤이어 ‘사경회’(査經會)라는 이름의 성경을 집중적으로 공부하는 성경공부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사경회 운동은 1903년과 1907년의 한국의 부흥 운동을 가능하게 하였습니다. 그뿐 아니라 일제하에서도 교회의 지속적인 성장을 가져왔으며, 해방 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조직적인 성경 공부가 한국교회 성장의 토대가 되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사경회는 초기에 선교사와 그 부인들, 한국인 조사와 장로들 및 권서들이 인도하였으나, 뒷날에는 주로 한국인 지도자들이 부흥회를 인도하면서 사경회를 겸하였습니다.

1908년 미 북장로교 선교 구역에서만 800여 회의 사경회에 5만여 명의 신자들이 참석하였습니다. 이 무렵에는 신자들의 60% 정도가 매년 사경회에 참가하고 있었습니다. 1901년 평양에서 개최된 사경회에는 압록강 가의 삭주 창성 지방의 자매들이 행리를 머리에 이고 등에 지고 300리 길을 걸어왔고, 그 이듬해 평양에서 열린 ‘사나이’ 사경회에는 멀리 전라도의 목포 무안 지방에서 참석한 형제들이 있었습니다(「그리스도신문」 6-5호, 1902. 1. 31일자). 1909년 10일간의 성경공부를 위해 한 자매는 머리에 쌀자루를 이고 300마일을 걸어왔고, 다른 이들은 거기에다 아이들까지 업고 왔는데 그들은 손때 묻고 닳은 성경책을 갖고 있었습니다(H. Miller, “Matters of Moment,” Bible in the World, 1909. 9. p. 263).19)

이와 같은 한국 기독교의 ‘성경기독교’적인 성격은 한말 일제하에서뿐 아니라 해방 후에도 지속되었고 또한 교회 성장의 중요한 요인이 되었습니다. 한국교회가 자랄 수 있는 영적인 토대는 바로 성경이 한국 사회에 널리 보급되고 교인들 사이에서 공부되는 과정을 통해 마련되어 갔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한국교회의 주목할 만한 성장과 발전은 교회 초기부터 성경을 체계적으로 가르치는 성경 중심의 교회로 세워졌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20)

초창기 한국교회의 사경회의 회복

앞에서 이미 인용한 대로 초기 한국교회의 독특한 특성 가운데 하나는 그것이 “성경 중심적 기독교”였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한국교회가 이러한 특성을 갖게 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감당한 것이 바로 사경회였습니다. 초창기 한국교회의 신자들이 성경을 읽기 위하여 국문 운동을 일으켰으며, 성경을 배우기 위하여 사경회 운동을 열렬하게 진행한 사실은 위에서 이미 소개한 바와 같습니다. 그러나 한국교회가 부흥과 성장에 집중하면서 성경 사경회는 심령부흥회로 바뀌는 경향을 띄게 되었고, 성경이 아니라 감정과 축복 중심의 세속적 집회로 변절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한국교회는 초창기의 성경 사경회를 회복하는 일에 힘을 기울여야 합니다.

한국교회의 현실이 갖는 절망과 소망의 이중성

한국교회의 현실은 현상학적 관점은 물론 섭리적 관점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몰락과 붕괴의 현실 양상에 주목하는 입장과 하나님의 손길에 주목하는 입장이 그것입니다. 현상학적 관점과 섭리적 관점에서 한국교회 현실을 접근할 때 우리는 한국교회가 직면하고 있는 위기 상황은 절망과 소망의 이중성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합니다. 섭리적 관점에서 현실을 이해할 때 우리는 재앙이 아니라 복을, 절망이 아니라 소망을 품으신 하나님의 섭리적 요구를 새롭게 확인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나아가야 할 지향점과 내려야 할 결단을 그로부터 얻게 됩니다. 먼저 현상학적 관점에서 보자면 한국교회의 현실은 절망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국교회의 현실을 보면서 교회 안팎의 수많은 인사들이 한국교회는 지금 “붕괴”하고 있으며, “막다른 길”로 접어들었다고 서슴없이 말합니다. 대형교회들의 추태, 사회로부터의 무참하고도 모욕적인 공격, 신자들의 교회 이탈, 청년들의 교회 이탈, 대학가의 무신론 운동과 전도 거부 운동, 젊은이들의 헌금 거부 추세 등을 주목하면 한국교회는 무너지고 있고, 한국교회는 붕괴하고 있다고 할 만큼 절망적이고 부정적인 것이 사실입니다. “20년 후에는 기독교 인구가 400만대가 될 것이다!”라고 단언하는 이도 있습니다. 현상학적으로 볼 때 한국교회가 절망적이라는 것은 교회 안팎의 거의 모든 이들이 공통적으로 쏟아내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섭리적 관점에서 보자면 소망이 있다고 봅니다. 한국교회의 현실은 단순히 벌어지고 있는 현상에만 집중하여 접근할 일이 아닙니다. 이러한 현상을 주도적으로 이끄시는 보이지 않는 손으로서 하나님의 섭리라는 관점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한국교회가 처한 현상으로 말미암아 가장 큰 능욕을 받는 이는 한국교회 신자나 지도자들이 아닙니다. 하나님 자신이 가장 큰 능욕을 받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망하고 성전의 기물들이 이방 원수들의 승전 술 파티용 기구로 사용됨으로 실은 망한 이스라엘이 아니라, 하나님이 가장 큰 능욕을 당했던 것과 마찬가지 현상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한국교회를 막다른 길로 몰아붙이는 “하나님의 손길”이라는 관점에서 오늘날 한국교회가 처한 현실을 접근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한국교회는 그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서도 아무런 문제없이 잘 성장하고, 환대받고, 사회의 주류 세력으로 군림하고, 편안히 잘 사는 수십 년을 지내온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행복이 아니라, 불행이었습니다. 아무런 문제가 없었던 것이 아니라 심각한 문제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계속 쌓여왔던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온 대가를 지금 혹독하게 치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현상은 단순히 한국교회가 저지른 과오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고 있다는 관점에서만 현실을 인식하는 것은 신앙적인 태도가 아닙니다. 단순히 인과응보의 차원에서 잘못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는 자연 원리가 작동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역사의 주인이시라는 사실을 믿는 신자라면 지금 이렇게 참담한 역사 현실 속에서도 하나님은 여전히 역사의 주인으로 일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의심할 수 없습니다. 그 사실을 믿기 때문에 신자인 것입니다.

섭리적 관점에서 작금의 한국교회 현실을 이해할 때 분명해지는 것은, 하나님께서 지금 한국교회를 막다른 길로 몰아가고 있는 것이라는 이해입니다. 마치 도망자 요나를 몰아가셨듯이 한국교회를 향하여 하나님의 손길이 움직이고 있다는 입장입니다. 하나님이 몰아가시는 막다른 길에 이르면서 한국교회는 몇 가지 사실을 반드시 배우고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을 두 가지만 든다면, 대형교회 만능의 원리는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는 사실과, 주특기 하나면 만능이라는 것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일 것입니다. 이것은 다른 말로 하면, 물량 최우선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 세상이라는 것과, 기본을 무시한 주특기 하나로 모든 것이 통합되고 요약되는 세상이 더 이상 아니라는 확인입니다. 이 사실을 확인하면서 “교회란 무엇인가?” “신자란 무엇이며,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라는 필연적 질문에 부딪치게 될 것입니다. 그러한 자기 성찰적 질문은 당연히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다”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기본으로 돌아가는 것이다”라고 표현되는 결론으로 우리를 인도할 것입니다. 이것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결국 어떤 대가를 지불하더라도 이제는 교회가 교회다워지고, 신자가 신자다워지는 길로 가야 된다는 확인과 결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그 길로 들어서는 것이 한국교회가 새로워지는 출발점이 될 것이고, 그것이야말로 한국교회의 소망의 시작이 될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현재의 한국교회의 절망적인 현상은 사실 소망의 결정적인 기회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가야할 길

두 가지 측면에서 우리가 가야할 길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는 조건의 측면이요 다른 하나는 각오의 측면입니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한국교회가 절망과 위기의 상황을 오히려 새 역사의 시작이라는 소망의 발판으로 만들기 위한 필수적인 조건은 “이제는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다!” “기본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결론을 확인하고 그것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와 신자들의 삶에서 하나님의 침묵과 하나님 부재 현상을 극복하고 하나님으로 말씀하시게 하고, 하나님이 다스리시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실현하는 구체적인 방법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 외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 요약하면, 한국교회는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되고, 그것을 실천하는 구체적인 내용은 결국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능통하게 되고,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일에 치열한 삶을 살게 되는 두 가지를 동시에 갖추는 것을 의미합니다. 교회와 신자들의 삶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최우선 순위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설교자의 강단도, 교회의 운영과 생활도, 신자들의 삶의 현장도 말씀 이탈로부터 말씀 중심으로 돌이켜서 이제는 말씀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드러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신자가 신자다워지고, 교회가 교회다워지는 데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역사의식과 결단을 갖고 말씀으로 돌아가서 말씀 최우선으로 신자의 삶을 살고 교회의 삶을 살기로 하는 소수의 지도자와 교회를 통하여 한국교회 역사를 다시 새롭게 시작하실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마치 예레미야 5장에서 한 사람을 긴급히 찾고 계시듯이, 오늘도 이런 신자와 이런 교회를 찾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한 사람 때문에 예루살렘을 다시 멸하지 않고 건지시겠다고 하시듯이, 한국교회의 역사를 새롭게 시작하실 것입니다. 여기에 한국교회의 소망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의 한국교회의 현실은 어디를 주목하여 보는가에 따라 절망과 소망의 이중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시대의 신자와 교회 지도자와 교회가 긴급히 가져야 할 지혜가 무엇인가는 분명합니다. 하나님이 몰아가시는 그 지점에 빨리 가 있는 것입니다. 버티고 버티다가 기진맥진한 다음에야 어찌할 도리가 없어서 그때서야 그것을 깨닫게 되면 여력이 없어서 그 일을 못하게 되고, 너무 늦어버려서 그 길에 들어서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그야말로 몰락하고 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움직이시는 손길을 바라보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몰아가시는 그 지점을 확인하고 속히 그곳으로 가야 합니다. 그것이 지혜이고 그것이 살아날 길입니다. 그렇게 하는 신자들과 교회들이 하나님이 새롭게 시작하시는 새 역사의 주인공이 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지금 한국교회가 처한 위기 상황은 어떻게 반응하는가에 따라서 그야말로 놀라운 기회이기도 합니다. 그런데도 중심 세력과 기득권으로 풍성하게 지내왔던 과거의 역사에 대한 미련과 집착을 버리지 못하고 그것을 유지하고 되살려내기 위하여 몸부림을 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처신입니다. 지금 문제아로 지목된 몇몇 교회들과 유명 지도자들이 온갖 추태를 벌이며 비난의 중심에 서기를 마다하지 않는 것의 핵심에는 지금까지 사이즈가 큰 것, 무엇인가로 유명해진 것을 근거로 누렸던 중심 세력의 명예와 기득권의 편안함에 대한 미련과 집착을 버리지 못하여 어떻게든 그것을 놓치지 않으려는 과거 지향적 역사관과 더러운 이익을 탐하는 탐욕이 자리 잡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절대로 통하지 않을 것인데도 그것을 붙잡아보고 유지해보려는 불쌍하고 애처로운 몸부림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마치 요나가 타고 도망가던 풍랑 만난 배를 어떻게든 침몰로부터 지켜보려고 효과 없는 온갖 몸부림을 다하던 그 배의 선원들이나 다를 바 없는 모습입니다. 역사를 바로 바라보는 사람이라면 과거에 집착하지 말고 빨리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역사의 흐름에 합류해야 합니다. 한국교회 위기의 핵심 문제와 회복의 핵심 방편은 사람에 초점을 맞추어 말하면, 지도자들이 속히 책임있는 대변신을 하는 것입니다. 더 직설적인 말로 하면, 한국교회의 지도자들과 교인들이 이제부터라도 예수를 제대로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제대로 믿는 목사가 되고 장로가 되고 교인들이 되자는 각성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용에 초점을 맞추어 말

하면,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신자가 신자답게 되고, 교회가 교회답게 되는 일에 진력하는 것입니다.

물론 위와 같은 대변신은 마음 한 번 먹고 결심하는 집회 한 번해서 되는 일은 아닙니다. 고난과 외로움과 고단한 하루하루를 당해내야 하는 길입니다. 이 시대의 흐름을 거역하는 무모한 모험을 몸으로 감당해야 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교회가 변두리 그룹으로 소외당하고 배제당하는 외로움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목회자들에게는 억울한 모욕과 턱없는 경멸, 그리고 고달픈 가난을 감수할 것을 요구하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불가능한 것만도 아닙니다. 교회다워지기 위하여, 신자다워지기 위하여, 고난당하며 살기로, 모욕당하며 살기로, 그리고 변두리 그룹으로 외롭고 쓸쓸하게 살기로 작정을 하면 이 시대의 큰 흐름을 거스르면서 신자답고 교회답게 살아가는 것이 불가능하기만 한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그런 삶을 한 걸음 한걸음 살아가는 그곳에 신자와 교회의 진정한 능력과 영광이 있다는 비밀을 알아야 합니다. 여기에 몰락의 위기에 처했다고 절망하는 한국교회의 진정한 소망이 있습니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교회가 교회다워지고, 신자가 신자다워지는 데에 한국교회의 진정한 소망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어떤 대가를 지불하고 어떤 고난과 불이익을 당하면서라도 말씀으로, 하나님께로, 기본으로 돌아가겠다는 각오로 그 걸음을 한 걸음씩 옮겨갈 때 현실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1) www.kosis.kr 국내국제통계>인구가구>인구총조사>총조사인구(2005)>종교별인구

2) 한춘기 교수는 그의 논문 “한국교회의 나아갈 길- 복음주의 기독교교육의 관

점에서”에서 한국교회의 양적 성장이 감소 추세로 돌아선 원인을 외적인 원인

과 내적인 원인으로 구분하면서 다양하게 그 원인을 규명하는 시도를 하고 있

다(참조. 「한국복음주의 신학회 제60차 정기논문발표회 논문집」, 70-74).

3) 기독교윤리실천운동, “2008년 한국교회의 사회적 신뢰도 여론 조사 결과발표

세미나”(서울: 기윤실, 2008).

4) 최승락, “반기독교 운동, 그 실태와 대처”, 「제주지역 3개교단 연합 신학포럼」

(고려신학대학원, 2012. 6. 15), 미발간 강의안, 1-12.

5) 참고. 정창균, “신천지 이단의 성경해석과 설교적 대응”, 「설교한국」(서울: 한

국설교학회), vol.4 no.1, 30-64.

6) 밀라드 J. 에릭슨, 제임스 헤플린, 『건강한 교회를 위한 교리설교』, 이승진 역

(CLC, 2005), 55에서 재인용.

7) 이만희, 『천국비밀 요한계시록의 실상』(도서출판 신천지, 2005), 23.

8) 루돌프 보렌, 『설교학원론』, 박근원 역 (대한기독교출판사, 1979), 44.

9) Paul S. Wilson, Practice of Preaching (Nashville: Abingdon Press, 2004), 31-32.

10) 제임스 D. 스마트, 『왜 성서가 교회 안에서 침묵을 지키는가?』, 김득중 역(도

서출판 컨콜디아사, 1982), 27.

11) 같은 책.

12) 김영재, 『한국교회사』(수원: 합신대학원출판부, 개정3판, 2009), 80-84.

13) 이만열, 『한국기독교와 민족의식』(서울: 지식산업사, 1991), 153-154.

14) 권서의 역할과 활동 등에 대하여는 이만열, “권서에 관한 연구”, 『한국기독교

와 민족의식』, 109-199를 참조하라.

15) 이만열, 「한국교회사」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2012년 1학기 강의안), 36.

16) 김영재, 『한국교회사』, 84.

17) 이만열, 「한국교회사」, 35.

18) “Matters of Moment” Bible in the World, Mar.1907, 70. 이만열, 「한국교회사」,

35에서 재인용.

19) 이만열, 「한국교회사」, 37.

20) 이만열, 「한국교회사」, 35, 37.

정창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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