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보내시는 분을 신뢰하라

사사기 6:12-17

2018학년도 합신 입학설명회 설교

정창균 총장

하나님과 기드온의 믿음 논쟁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유명한 기드온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기드온을 등장시킨 하나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인가? 그 하나님을 신뢰하라는 하나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미디안에게 억압 받고 있고 고통 당하고 있고 그래서 신음하고 있고 부르짖는 그러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출해내기 위해서 기드온을 보내고자 하십니다. 기드온을 미디안의 군대에게로 보내고자 하시는데 그 보내심에 대하여 기드온은 아무 보장도 없이 무대포로는 못가겠습니다. 그렇게 버팁니다. 하나님은 나를 믿고 가라고 하시고 기드온은 믿을 수 있는 증거를 줘야 믿겠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둘 사이에 거대한 대 논쟁이 벌어집니다.

하나님은 과거에 내가 애굽에서 이끌어 낸 그것이 증거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나다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너를 보내고 있다. 이것이 증거라고 말합니다. 내가 너를 보내고 있다.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한다. 이렇게 말합니다. 기드온은 그것 말고 지금 내가 손에 잡고 확인할 수 있는 증거를 내 놓아야 그것을 믿겠다고 말합니다. 그것이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핵심 내용입니다. 대논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양자의 논리

하나님은 기드온을 미디안에게로 보냅니다. 가서 미디안을 물리치고 이스라엘을 구하라는 것이지요. 그 일을 위해서 하나님이 하나님의 사자를 보내는데 그 사자가 와서 포도주를 짜고 있는 기드온에게 하는 첫 마디가 이것입니다. 12절이지요. “여호와의 사자가 기드온에게 나타나 이르되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 그 말을 듣자마자 기드온이 반응을 합니다. 용사 좋아하시네. 용산데 이렇게 숨어서 포도주를 짜고 있단 말인가? 함께 하는 것 좋아하시네. 하나님이 함께 하고 있는데 우리 꼬라지가 이 모양 이 꼬라지란 말이에요? 애굽에서 우리의 조상들을 어떻게 건져냈는가 하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런 일이 있었다고 합디다. 그랬으면 지금도 그 일을 해야 우리가 그분인줄 믿을 거 아니겠습니까? 지금은 아무 일도 없고 오히려 속수무책으로 우리를 여기다 버려 버려서 우리가 이 꼴 당하고 있는데 어떻게 믿는단 말입니까?

제가 지금 추리 소설과 지어낸 소설을 쓰고 있는 것일까요? 13절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오 나의 주여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면 어찌하여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일어났나이까 또 우리 조상들이 일찍이 우리에게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애굽에서 올라오게 하신 것이 아니냐 한 그 모든 이적이 어디 있나이까” 예 그 말은 들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 일이 어디 있습니까? “여호와께서 우리를 버리사 미디안의 손에 우리를 넘겨주셨나이다” 지금 하나님은 미디안 군대만도 못한 분 아닙니까? 그 하나님이라는 증거를 내놓으십시오. 그러면 믿겠습니다. 이렇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기드온 사이에 믿음이란 무엇인가를 놓고 대논쟁이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래서 대답을 합니다. 여호와께서. 답답하셨던 것 같아요. 앞에서는 여호와의 사자가 말했다 그랬는데 여기는 여호와께서 말했다 그래요. “너는 가서 너의 힘으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라. 내가 너를 보낸 것이 아니냐?” 증거를 주시라고 그러면 믿겠다고 하는데 증거라고 내놓은 것이 내가 너를 보내고 있다. 두 사람의 사오정이 서로 각각 자기의 말을 하는 것 같아요. 증거를 달라는데 내가 너를 보내고 있다.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고 너의 힘으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라. 그것이 하나님이 답변입니다.

즉각 기드온이 반대 토론을 시작합니다. 15절 “그러나 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오 주여 내가 무엇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리이까 보소서 나의 집은 므낫세 중에 극히 약하고 나는 내 아버지 집에서 가장 작은 자니이다” 내 힘으로 가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라구요? 내 손에 무엇이 있는데요? 내가 무엇으로 구원합니까? 내가 가문이 뛰어납니까? 학벌이 뛰어납니까? 교회가 큽니까? 내 출신 학교가 대단합니까? 무엇으로 구원한단 말입니까? 자신 있게 항변하며 반대 토론을 벌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시 또 논쟁의 반대 토론을 펴십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니 네가 미디안 사람 치기를 한 사람을 치듯 하리라” 답이 아니잖아요. 옛다 이것 갖고 해라. 옛다 여기 10억 통장 있다. 이것 갖고 가서 교회 개척해라. 이런 걸 달라는 것인데, 그러면 믿겠다는 것인데요. 하나님은 계속 나다. 내가 너를 보낸다. 내가 너와 함께 있다. 그러시는 거예요. 이게 무슨 믿을만한 증거가 되냐 말이죠.

그러므로 기드온은 끝까지 믿지 않습니다. 예, 나와 말씀하시는 이가 그 하나님이시라는 그 주님이시라는 표징을 주십시오. 17절입니다. “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만일 내가 주께 은혜를 얻었사오면 나와 말씀하신 이가 주 되시는 표징을 내게 보이소서.” 이 싸움, 이 논쟁이 계속 되고 있습니다. 믿음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대논쟁입니다. 둘 다 믿음을 이야기 하고 있는데 무엇이 믿음인가에 대하여는 각각 다른 이해를 갖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니까 믿으라는 것이고. 기드온은 이런 일을 하는 것을 보니까 그분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믿겠다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나다. 내가 너를 보낸다.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다.” 하시고, 기드온은 “증명하십시오. 지금 내가 인정할 증거들을 행하셔서 내 앞에서 그 하나님이 되십시오.” 하고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믿음의 대논쟁에 대한 핵심 본질은 하나님에 대한 불신입니다. 하나님을 내 경험의 세계와 내 이성의 세계와 내 상식의 세계와 내 논리의 세계와 내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현상학의 세계로 들어오셔서 그 안에서 내가 인정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하나님이셔야 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때 하나님을 인정해 드리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네가 나를 그런 하나님인줄을 믿으면 네가 그 일을 할 수 있게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믿음

여러분 믿음은 무엇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나를 보내신다. 하나님이 나를 부르고 계신다라고 할 때 여러분에게 떠오르는 생각은 무엇이고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내놓을 수 있는 고백은 무엇이고 움직일 수 있는 손발은 무엇입니까? 왜 하나님 불신으로 가게 되는가? 자기 신변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삼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 신변의 안전이 우선순위가 되면 그때는 언제나 하나님을 불신하는 데로 가게 됩니다. 그래서 지금 믿을 수 있는 증거를 내 앞에서 내놓으셔서 내가 인정할 수 있는 하나님이 되시라고 하나님께 요구하게 됩니다. 이렇게 가면 반드시 어떤 현상이 찾아오게 되는가? 절대로 모험을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신앙은 누리는 평안함이 아니고 확인하는 안전함이 아니라, 하나님이 누구인가 하는 것이 너무 분명하니까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 하는 것이 너무 확실하니까 떨어질지 모르지만 하늘 끝까지 올라가는 것입니다. 빠질지 모르지만 땅 끝까지 달려 나가고 싶은 모험을 가리켜서 신앙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신앙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험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지 못하면 모험을 할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언제나 홍해가에 서 있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홍해를 건넜습니다. 홍해를 건너기 전에 홍해가 갈라지고 그 길에 길이 나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널 때에 그들은 하나님을 믿고 건넌 것이 아닙니다. 강바닥에 나 있는 길을 믿고 건넌 것입니다. 그 상태인데도 건너다 빠져 죽으면 어떡해 하고 안건너는 사람은 믿음이 없는 사람이 아니고 바보 천치 같은 사람입니다. 홍해는 하나님께서 미리 강을 갈라놓으시고, 안전을 확인시켜 주시고 그리고 건너게 하셨습니다. 모두가 아무런 두려움이나 의심 없이 그 강을 건넜습니다. 히브리서에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넌 사건을 회상하면서 “믿음으로 그들은 홍해를 육지 같이 건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홍해를 갈라서 육지같이 길을 내실 것이므로 우리는 들어가도 죽지 않는다는 믿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현상을 이미 만들어 놓으셨고 그것을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들어가서 건넌 것입니다. 기도온이 하나님께 요구한 것도 이런 것입니다. “애굽 사람들은 이것을 시험하다가 빠져 죽었”다고 곧이어 말씀합니다. 애굽 사람들은 하나님이 이렇게 하셨다는 것도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이 다시 물을 합하여 길을 없애버려서 모두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지도, 인정하지도 않고, 거기 길이 나있고, 쟤들도 다 건너갔으니 자기들도 당연히 그렇게 된다고 생각하고 들어간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시험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도 않고, 하나님이 이 물을 다시 합해버릴 수도 있는 분이라는 것을 생각지도 않았습니다. 아니 그런 일을 절대로 있을 수 없다고 자신 했을 것입니다. 그 근거는 하나님을 믿어서가 아니라, 이스라엘 쟤들도 그렇게 했으니까요. 그냥 역사는 이렇게 이대로 가는 것이라고 믿고 그들도 스스럼 없이 바다에 들어갔습니다. 역사는 이대로 갈 수 밖에 없는 것이라고 당연한 것으로 알고 사는 것이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40년 훈련을 하고 40년 경험을 하고 40년 하나님을 안 다음에 젖과 꿀이 흐르는 광대한 땅, 아름다운 땅, 약속의 땅을 눈앞에 두고 요단강이 가로막혔을 때는 하나님이 홍해에서 처럼 하지 않으셨습니다. “너희가 요단에 이르거든 요단에 들어서라” 요단 강물은 지금 곡식을 거둘 때여서 언덕에까지 흘러넘치고 있다고 몇 절 뒤에는 기록해놓았습니다. 들어가면 죽는데 거길 들어가라는 거에요. 하나님에 대한 신뢰. 저 땅에 들여놓겠다고 40년 전에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뢰, 그 언약을 하신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를 갖지 않으면 요단강은 절대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들어가면 죽는다는 것은 창조의 질서요, 경험으로도 100% 확신한 사실입니다. 들어갔는데 안죽고 약속의 땅으로 들어갈 수 있을지 없을지는 가봐야 아는 사실입니다. 죽는 것은 확실한 현실이고, 안죽고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은 약속일 뿐입니다. 눈앞에 있는 이 확실한 현실을, 어떻게 가봐야 아는 불확실한 다른 것에 굴복을 시킬 수 있을까요?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를 갖지 않으면 들어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부르셨으니 하나님이 나를 책임지신다. 나는 하나님이 가라고 하시는 곳으로 가고, 하나님이 하라고 하시는 일을 하면 된다. 나머지는 하나님이 책임지시고 하나님이 쓰신다. 이 신뢰가 없으면 아무리 부르심을 확실하게 확인했어도 못들어갑니다.

보내시는 분을 신뢰하라

“보내시는 분을 신뢰하라!” 부르신 목회자의 길을 가겠다고 신학교를 가기로 결심하고 우리 학교를 찾아올 여러분에게 금년도 입학설명회의 표어로 삼고 여러분에게 드린 메시지가 그것입니다. “보내시는 분을 신뢰하라.” 여기에 정말 기가 막힌 비밀이 있습니다. 이 문맥을 보면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한다. 내가 애굽에서 너희를 이끌어내오는 그 일을 해냈다. 그런데 그 일을 다시 하겠다는 것입니다. 너의 이 힘으로 해라. 그러나 실제로는 하나님이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모세를 처음 불러서 출애굽을 시작하는 첫 장면에서도 동일한 말씀하셨습니다. 못갑니다. 내가 누구이기에 갑니까?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한다. 그 말씀은, 가기는 네가 가지만 일은 내가 해.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라. “너 혼자 가는 것이 아니야, 내가 가!” 하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기드온에게 동일하게 하시는 말씀은 네가.. 네가.. 미디안 사람들을 한 사람을 처리하듯이 처리하고 올 것이다 입니다. 이게 무슨 말일까요? 실제로 일은 하나님이 다 하시고 온 세상이 볼 때는 기드온이 한 것으로 만들어 주겠다는 것입니다. 땅 사는데 땅 값은 하나님이 다 지불하시고 등기부에 등기는 내 이름으로 등기 날인 해주시겠다는 이야기입니다. “네가 한 것이 될 것이다.네가 너의 힘으로 한 것이 될 것이다!”

여기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그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 길을 가는 사람들의 기가 막힌 비밀스러운 기쁨이 있고 즐거움이 있고 감동이 있고 감격이 있습니다. 우리 합신은 한국 교회는 계속 어려워지고 있고 계속해서 혹독한 고난의 세월을 가겠다 하는 것을 모두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망하는 데로 가는 길이 아니요. 이것은 끝장나는 길로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절호의 기회다. 우리는 모두 이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상황이 혹독할수록 진짜인 사람은 빛을 발하는 법입니다. 시험문제가 어려울수록 제대로 공부를 해놓은 사람은 빛이 나는 법입니다. 한국교회는 목회현장이 날로 혹독해지고 있습니다.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한편으로 절호의 기회입니다. 제대로 준비하여, 제대로 하는 사람들에게는 빛이나고 가치가 드러날 기회입니다. 이제는 진짜여야 되고, 이제는 정말 제대로 하는 것이어야 되고, 이제는 정말 하나님께로 돌아가고, 그의 말씀에 모든 걸 걸고 사는 이 진짜들이 살아남는 절호의 기회라고 저는 확실하게 믿고 있습니다.

이제는 교회가 커지고 세력을 가지고 큰일들을 많이 하고 전도의 영역을 확장하고 다른 사람 많이 돕고 이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 역사를 이미 통과해 왔습니다. 이제는 한국교회는 새로운 국면으로 인도받고 있습니다. 지금부터 한국 교회는 목사가 목사다워지고, 신자가 신자다워지고, 그래서 교회가 교회다워져야만 되는 새로운 역사를 하나님이 우리 앞에 펼치고 있습니다. 이것이 앞으로 펼쳐질 한국교회 역사에 대한 저의 해석이고 확신입니다. 그 일을 대비하여 우리 학교는 여러 일들을 진행하고, 기도하고, 준비하고, 각오하고 있습니다. 왜 이 길을 가야 되는가? 이 길을 가다가 종착점에 도착 못하고 죽어도 괜찮은 길인가? 하나님이 정말 나를 보내시고 있고 하나님의 목적이 있다고 믿어지고 있는 것인가? 이것을 확실히 해야 합니다. 왜 이 길에 나서려 하는가? 무엇을 근거로 하나님이 나를 보내고 있다고 확신하는가? 하나님이 나를 보내서 무엇을 하시고자 하는가에 대해서 흔들림 없는 확신이 있는가? 그것을 먼저 점검하셔야 됩니다. 어디로 가야 일자리가 많을까가 관심사이면 결국 더 나은 일자리, 더 편한 일자리, 더 인기 있는 일자리를 찾는 것이 여러분의 생각과 행동과 처신을 결정하는 중요한 기준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평생을 살면서 인생과 하나님 주신 기회와, 하나님이 부르심을 낭비한다면 그것은 방탕한 것입니다. 부르신 하나님을 신뢰하고 좋은 길이 아니라, 옳은 길을 가야 합니다. 안전한 길이 아니라, 하나님이 약속이 있는 길을 가야합니다.

이 주제를 제가 한마디로 다시 말합니다. “보내시는 이를 신뢰하라.” 보내시는 이를 신뢰해야 됩니다. 신학도로 부르심을 의식하고 소명을 갖고 이제 그 역사에 발을 디뎌 놓기 위하여 이렇게 모여 있는 여러분들의 앞길을 하나님께서 이끄시고 복주시기를 빕니다. 여러분이 어디에 있든지, 어느 학교에서 훈련을 받게 되든지, 점점 더 어려워진다는 한국 교회를 책임질 현장에 교회 지도자들로 여러분을 반드시 세워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정창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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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 주일을 향하는 7주간 시리즈 설교(제2주-1)

성경에서 말하는 증인은 ‘본 사람’이 아닙니다. 구경한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이끌어 가시는 구속의 큰 역사, 예수님이 친히 시작하시고 이어가시는 예수의 역사에 참여한 사람, 동참한 사람이어야 증인입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를 멋드러지게 하고, 예수님에 대한 책을 쓰고, 예수님에 관한 영화를 멋있게 만들었어도 그 사람 자신이 예수 믿는 사람이 아니면 예수님의 증인이 될 수 없습니다. 증인은 예수님의 역사에 자기 자신이 참여한 사람입니다.

성령강림 주일을 향하는 7주간 시리즈 설교(제2주)

성령이 오시면 주신다는 그 능력은 구체적으로 무슨 능력인가? 본문만 가지고는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말씀을 안 하셨기 때문입니다. 능력을 받아서 증인이 된다고만 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능력에 대한 자기 자신의 생각을 가지고 이 능력을 말하곤 합니다. 그리고 성령이 그 능력을 주실 것이라고 믿고, 그 능력을 사모합니다.

부활절 이후 7주간 성령설교(제1주)

그런데 주님은 이들에게 아주 중요한 약속을 확실하게 하십니다.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너희에게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보내주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성령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명령을 하십니다.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면 너희는 땅 끝까지 가서 나의 증인이 되라.” 이렇게 말씀하신 후에 예수님은 제자들을 땅에 남겨놓으시고 그냥 가셨습니다. 고아처럼 버려 두지 않으시겠다고 하던 주님이 고아처럼 버려두고 가셨습니다. 기약도 없이 때도 없이 주님이 떠나가셨습니다.

부활절 설교- 사망을 이기고 부르는 노래

하나님이신 우리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역사가 거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죽으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구주께서 다시 살아 나셨습니다. 부활하신 것입니다. 죽음이 역사적 현실이고 구체적 사건이고 개별적 경험이듯이, 부활도 구체적 사건이요 역사적 현실이요 개별적 경험입니다. 죽음의 시체가 거기 있었듯이, 부활한 몸체가 거기에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부활을 말씀하면서 그것은 당연히 죽음 몸이 다시 살아나는 것으로 전제하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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