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너의 직무를 다하라

(딤후 4:1-5)

정창균(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총장)

오늘은 종강 날입니다. 3학년 학우들에게는 오늘이 공식적인 공부로는 이 학교에서 보내는 마지막 날입니다. 3년간 학교에서 공부를 마치고 떠나는 여러분 가운데 한 사람이 학교에게 너무 감사하고 동료들이 너무 고마워서 한 달 사례비도 더 되는 돈을 털어서 전교생에게 점심 식권을 대신 선사하였습니다. 동료 한 사람의 덕으로 학교 전체가 점심 한 끼를 맛있게 먹어도 되는 멋지고 행복한 날이기도 합니다. 오늘 공식적인 예배로는 마지막 예배를 드리는 3학년 여러분과 그 뒤를 따르는 재학생 여러분에게 마음을 다해서 유언처럼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본문에서 바울이 디모데에게 유언처럼 한 그 말씀입니다.

I. 권위에 찬 명령 – 너의 직무를 다하라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말씀은 자기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의식하는 한 사역자가 30년 가까이 같은 길을 살아온 제자 한 사람에게 마지막으로 남기는 말입니다. 어떤 사람은 며칠 후라 말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2-3주 후라 말하기도 하지만, 어쨌든 본인이 이제 이 세상을 떠난다는 것을 분명하게 의식하고 그날이 임박했다고 느끼며 제자에게 남기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과 디모데입니다. 바울 사도에게 디모데는 동역자 사이나 선생과 제자 사이 정도로 부르기에는 설명이 부족한 특별한 관계를 맺고 살아온 사이입니다. 때로는 아들이라 하나 아들이란 말만 가지고는 양이 안 차서 나의 “참 아들”이라고 말해야 하는 각별한 관계를 맺고 살아온 사람입니다. 이제 죽음을 눈앞에 두고 떠나갈 사람이 아직 남아서 한참 더 그 길을 가야 하는 남겨질 아들과 같은 제자에게 하는 말은 크게 보면 두 마디로 요약됩니다. 보고 싶다는 말과 너의 직무를 다하라는 말입니다.
4장 마지막 장에 보면 사도가 디모데에게 여러 말을 하는데 가만히 보면 결국 한 마디입니다.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 ‘이 겨울이 오기 전에 내게로 오라.’ 한 마디로 요약하면 ‘네가 보고 싶다’는 것입니다. ‘나의 마지막 순간을 너와 함께 하고 싶다. 너는 내가 이 땅에서 누리는 마지막 순간을 함께 하고 싶은 사람이다’ 하는 말입니다. 속히 오라는 말에 여러 이유를 달고 있습니다. 겉옷을 가지고 오라. 가죽 종이에 쓴 것을 가지고 오라. 그러나 가만히 그 심정을 살펴보면 그건 그냥 오게 하고 싶은 구실일 뿐이고, 정말 하고 싶은 말은 보고 싶다는 것입니다. 저도 나이가 들어가고 있습니다만, 나이 들어가면서 정말 중요한 것은 정든 사람이 옆에 있는 것입니다. 별 이유도 없이 보고 싶은 사람이 있는 그런 인생을 사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것이 사도가 편지를 마치는 마지막 부분에서 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4장의 앞부분에 중요한 한 가지를 유언처럼 말씀합니다. “너의 직무를 다하라”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유언적 권면을 하기 위하여 자신이 어떤 근거로 이러한 명령을 하는지를 밝힘으로써 시작합니다. 그것이 1절입니다. “하나님 앞과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가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무엇인가 말하려고 하면서 말하기 전에 그런 말을 하는 배경과 근거를 먼저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심판자요 왕권을 갖고 다시 오실 그리스도 예수를 근거로 하는 명령인 것입니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은 하나님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의 권위로 하는 명령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한 마디를 덧붙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가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하는 말이다.” 하나님 그리고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의 권위와 그의 입장과 그의 말씀과 그의 자리에서 말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완성하고 통치하실 그의 나라를 바라보며 그 시점에서 너에게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현장, 예수 그리스도가 완성하시고 통치하실 그 나라가 임하는 그 현장, 그 시점에서 지금 내가 너에게 이 말을 하는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지금 어떤 기분이 드세요? 무슨 말을 할지는 모르지만 서두로 꺼내는 이 말만 들어도 최소한 세 가지 사실이 분명해집니다. 첫째는 매우 엄위하고 엄숙하고 두려운 말이로구나, 하고 두려운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을 들고 나오고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자의 권위를 들고 나와서 하는 말이니까요. 장난으로 하는 말이나 지나가는 말로 하는 말이 아니고 두려운 마음을 품게 합니다. 이것은 보통 말이 아니로구나! 정말 무거운 말이고 엄숙한 말이고 엄위한 말이로구나! 사실이 그렇습니다.
둘째는 아, 지금부터 듣게 되는 말은 나에게 매우 영광이요 명예로운 말이로구나! 하나님이 동원되고 그리스도 예수가 동원되고 그리스도 예수께서 재림할 시점과 그가 완성하고 통치할 그의 나라의 시점에서 나와 관련을 맺고 내게 주어지는 말이다. 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가! 얼마나 명예로운 일인가! 과연 그렇습니다. 셋째로 이 말씀을 들으면 분명히 와 닿는 게 있습니다. 단순히 내가 하는 일이라거나 너와 나 사이의 인수인계 사안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다시 오실 그리스도 예수 그분이 그의 왕국을 통치하시고 마침내 완성하실 텐데 바로 그가 책임지고 보장하는 일이다, 하는 말씀입니다. 지금부터 주어지는 이 말은 이 세 가지의 배경으로 우리에게 주어지고 있다는 것을 사도 바울은 분명히 못 박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들으면 좋고 안 들어도 괜찮은 말, 지나가는 이야기로 격려하느라고 덕담으로 하는 말이 아니다. 매우 위중한 말이고 엄숙한 말이고 두려운 말이다. 이 말은 나에게 엄청나게 영광스럽고 명예로운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가 책임지시고 그 일을 하도록 보장하는 말씀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못 박고 있습니다.
이어서 드디어 사도 바울은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합니다. 똑같은 말을 세 번 반복합니다. 그만큼 중요한 말이라는 것이지요. 2절에서 말합니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그리고 5절에 다시 말합니다. “너는 전도자의 일을 하라.” 그리고 덧붙여 또 말합니다. “너는 너의 직무를 다하라.”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결국 하고 싶었던 말은 한 마디입니다. ‘너의 직무를 다하라.’ 사역자로서의 책임을 다하라 하는 말입니다. 이 말을 앞에서 풀어서 구체적으로 말할 때는 말씀을 전파하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그 말을 다른 말로 바꿔서 반복하면 전도자의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이 말을 결론적으로 요약해서 한 마디로 이야기한다면 네 직무를 다하라, 하는 것이었습니다.
사역자 직무의 가장 중요한 본질은 무엇인가? 하나님께 부름을 받은 가장 중요한 책임은 무엇인가? 직무라고 할 때 그것의 구체적인 내용은 무엇인가? 말씀을 전파하는 것이다. ‘설교 센터’ 앞에 써 놓은 것처럼 Preach the Word!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 다른 말로 하면 전도자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직무를 맡은 자의 자기 인식은 언제나 무엇이어야 하는가? ‘나는 말씀을 선포하는 자이다. 나는 전도자의 일을 하는 자이다. 그것이 내 직무다.’ 그 직무를 다하라는 것입니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전도자의 일을 하라. 네 직무를 다하라” 이 한 마디를 하기 위하여 사도 바울은 1절에 그렇게 엄청난 이야기를 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 앞과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가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II. 직무의 구체적인 내용과 궁극적인 목적
사도는 이어서 말씀을 전파하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하는 것인가를 밝힙니다. 2절에 보시면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이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해서 결국 무엇을 하자는 것인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고 오래 참고 가르치고 경책하고 경계하고 권하는데, 이 행위들은 말씀을 전파하는 방편이요 직무를 다하는 구체적인 모습들입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말씀을 전파해서 무엇을 이루자는 것인가? 긍극적인 목적이 무엇인가? 사도바울은 여러 곳에서 이것은 다양하게 말하였습니다. 사람을 살리고, 사람을 세우고, 사람을 온전케 하고, 사람들 구원에 이르게 하고…
골로새서 1장 28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라.” 모든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한 사람으로 세우고자 각 사람을 권하며 지혜를 다하여 가르칩니다. 이것을 사람을 살리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2장에서는 자기가 설교하는 목적이 무엇인지 말합니다. 2장 11-12절입니다.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너희 각 사람에게 아버지가 자기 자녀에게 하듯 권면하고 위로하고 경계하노니, 이는 너희를 부르사 자기 나라와 영광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께 합당히 행하게 하려 함이라.”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하게 세우려 한다는 말이나 각 사람이 하나님께 합당히 행하는 사람이 되게 하려고 한다는 말이나 같은 말입니다. 하나님께 합당히 행한다는 말은 하나님의 저울로 달아볼 때 무게가 나가는 사람이라 하는 뜻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각 사람을 세우는 것이 목표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하라는 것입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하는 말은 일의 효율성에 휘둘리지 말고 하라는 말입니다. 사역 혹은 직무를 다할 때 효율성에 휘둘리지 말고 그냥 그 일이 내가 해야 할 직무이기 때문에 하라는 이야기입니다. 실용주의가 핏속 깊이 흐르고 있다는 것이 오늘날 우리에게는 큰 약점입니다. 언제나 효율성과 효과를 가지고 처신을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이어지는 3절과 4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 이 말씀의 중요한 의미 가운데 하나는 상대방의 반응에 휘둘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냥 그 일을 하는 것이 내 인생인 줄 알고 그 일을 하는 것이 내 존재인줄 알고서 그 일을 하면서 살라는 말씀과 마찬가지입니다.
다시 정리해 보면 이렇습니다. 첫째, 말씀을 전파하라, 전도자의 일을 하라, 직무를 다하라 할 때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경책하고 경계하고 오래 참음으로 권하는 등 여러 방법들을 동원하여 하라는 것입니다. 둘째로 말씀을 전파하고 전도자의 일을 하고 직무를 다하는 데서 무엇을 각오하고 해야 할 것인가? 어떻게 그 일을 해야 한다는 말인가? 항상 힘쓰며, 오래 참으며, 모든 일에 신중하며, 고난을 받으며 하라는 것입니다. 잘 보시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말한 그 대목들 전부가 직무를 행하는 자의 인격이나 도덕이나 성품에 속하는 것들입니다. 직무를 행하는 자의 윤리적인 어떤 자세를 두고 말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가 사람을 만나서 말씀을 전파하거나 전도를 하거나 직무를 행하여 사람이 살아나게 하는 일을 하려 할 때 그 직무자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신학적 진술이나 철학적 태도가 아니라 사람들을 접하는 어떤 도덕적인 성품, 인격적인 모습입니다. 말씀의 내용과 그 사람의 중심과 신학이 중요하지만 그것을 다른 사람과 접촉시키는 통로는 전하는 사람의 성품이나 인격이 결정적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도 물론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 무엇을 어떻게 저들에게 말하는가? 어떻게 저들에게 그것을 보여주는가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이 부분은 거의 전부가 우리 인격의 문제와 성품의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말하는 자의 성격과 처신의 문제와 관련되어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내용이 좋으면 그것이 저절로 역사를 하는 것인가? 그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지요. 내용이 좋으면 매너도 좋아야 합니다. 내용이 좋으면 표현도 좋아야 합니다. 내용이 따뜻하면 말도 따뜻해야 합니다. 위대한 개혁신학은 우리의 성품과 인격과 도덕과 결합된 그릇에 담겨서 사람들이 맛을 보게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본문을 잘 보세요. 오래 참으며 신중하라는 것입니다.

III. 직무를 다하는 자가 가는 길 – 고난
세 번째로 사도 바울은 말씀을 전파하며 전도자의 일을 하며 직무를 다해서 그 길을 가는 사람이 각오해야 할 것을 밝힙니다. 그 길을 가면서 무슨 일을 당할 각오를 해야 하는가? 고난입니다. 고난을 당하라! 직무를 행하는 자에게 고난은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고난은 낯선 게 아닙니다. 고난은 이 직무를 제대로 하려는 자에게 자동으로 수반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전파하고 전도자의 일을 하고 그 직무를 다하는 길을 가려 하는 사람은 반드시 고난을 당할 것을 전제하고 준비해야 합니다. 막상 고난이 올 때 혼비백산하고 무슨 난리가 난 것처럼, 세상이 뒤집어지는 것처럼 놀라 자빠지거나 당황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것이 자연스러운 길인 줄 알고 그 길을 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고난을 받아라! 우리가 이 길을 가면 반드시 고난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이 길을 안 가면 어떤가? 안 가도 고난을 받습니다. 이 길을 가면 여러 고난을 받습니다.
이 길을 가면서 당하는 고난 가운데 가장 힘든 고난은 굶는 것, 핍박 받는 것, 이런 것이 아닙니다. 현장에서 매일 매일 직무를 행하는 자로 살면서 당하는 정말 힘든 고난은 3절과 4절에서 말하는 고난입니다.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 진리가 있는데 진리를 안 들으려고 돌이켰다는 말이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에는 진리를 따라 오다가 진리를 버리고 돌이키는 사람들입니다.
목회를 해보세요. ‘목사님 만난 것이 제 인생에 가장 큰 복이에요. 목사님 만나서 인생이 바뀌었어요. 저는 평생 목사님 따르며 목사님 목회를 도우며 사는 것이 저의 소원이에요.’ 실제로 그럴까요? 이미 여러분이 봤잖아요. ‘다른 놈들은 다 주를 버려도 나는 아닙니다. 나는 감옥만이 아니라 죽는 데라도 선생님과 같이 갈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베드로가 했던 말이지요. 그 날 밤 몇 시간 안 지나서 돌아섰습니다. 그 날 거기에서 있었던 일은 지금도 목회 현장에서 수없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말씀을, 내가 가르치는 바른 교훈을 받지 않을 뿐만 아니라 모욕을 하고 비난을 합니다. 자기 사욕을 좇을 스승을 두고 그리로 따라갑니다. 여기에 참 말씀이 있다고, 여기에 깊은 진리가 있다고, 저 사람은 제대로 안 된 가짜라고 그래도 소용없습니다. 아마 직무를 다하며 가는 길에 우리가 각오하고 감수해야 하는 고난 가운데 하나는 이 버려지는 고난, 배척당하는 고난, 배신당하는 고난일 것입니다. 동시에 이 진리의 말씀에 대하여, 말씀의 확장에 대하여 적대적 악의를 품은 세상에게 당하는 고난, 적대세력으로부터 당하는 고난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고난은 명예로운 고난입니다. 영광스러운 고난입니다. 사도 베드로의 말대로 하면, 하나님 앞에서 아름다운 것입니다. 죽는 것 같으나 죽어서 사는 고난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미 앞에서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말했습니다.(딤후1:8).
고난은 피하는 것이 아닙니다. 요나의 배에 던져진 하나님의 대풍은 짐 몇 개 내던진다고 극복할 수 있는 일이 아니죠. 선원들이 일심 단결하여 힘을 모아 노를 젓는다고 해결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대풍이 부는 바다의 그 상황에서 그냥 사는 것입니다. 고난은 피하는 것이 아닙니다. 고난은 극복하는 것이 아닙니다. 고난은 통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오히려 기회가 됩니다. 하나님은 고난의 과정을 통해서 우리를 정말 정결한 자들로, 순결한 자들로, 어디에 내어 놓아도 괜찮은 하나님의 손에 들린 자들로 다시 엮어낼 것입니다. 그 한복판에 여러분이 있다는 것, 그 한복판에 우리가 있다는 것을 기억하세요. 합신은 정말 놀라운 잠재력을 많이 갖고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이것입니다. 많은 교단, 많은 목회자들이 부흥이라는 이름으로 또 고난을 피한다는 이름으로 여러 편법을 두며 그 길을 갈 때 교회의 부흥이 좀 덜 되어도, 목회자가 대우를 좀 덜 받아도 제대로 바르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그 길을 40년 가까이 살아온 사람들입니다. 앞으로 한국 교회는 말씀대로 바르게 해보기 위하여 고난의 현장을 사는 것에 능숙한 사람들의 역사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살아 보려는 것을 우리의 정체성으로 알고 애쓴 사람들입니다. 손해 보더라도 그게 옳으니까 가야 한다는 정신을 가지고 살아 봤어요. 고생하기 싫고, 손해 보기 싫어서 쉽게 타협하고 다른 데로 안 가도 되는 저항력이 상당히 집단적으로 갖추어진 사람들이 합신 사람들입니다. 이제 우리의 시대가 오고 있는 거예요. 그렇게 연단 받고 훈련 받고 갖춰진 잠재력이 우리의 실력이 될 때가 된 것이에요.
고난을 피하려 하지 말아야 해요. 고난을 피하기 위해서 직무를 적당히 하려 하지 말고 직무를 다하기 위하여 배척을 당하고 핍박 받고 가난하게 살고 내몰리고 소외당하는 것들을 통과하고 갈 생각을 하세요. 우리가 그렇게 살아왔는데 못할 거 뭐 있어요? 안 살아본 사람은 놀라 자빠지겠지만 살아본 사람에게는 그 강도가 조금 더 심해졌다고 해서 그렇게 큰 일 아닙니다. 3학년 여러분, 이 시대를 책임지고 살아야 할 여러분에게 이제 학교를 떠나야 할 날이 몇 날 안 남은 자로서 유언처럼 말합니다. 받은 교훈대로 사세요. 거기에 우리의 실력이 있는 것이에요. 거기에 우리의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IV. 하나님이 보장하시는 길
이 본문을 읽다 보면 지금까지 한 말이 사도 바울이 제삼자의 자리에서 디모데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사실은 자기 얘기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이 말이 끝나자마자 사도 바울은 6, 7, 8절에 그렇게 말합니다.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 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바로 자기 이야기로 넘어가고 있습니다. 자기가 그렇게 살아오고 이제 인생의 마지막 장면을 눈앞에 두고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살아온 인생을 돌아보고 있습니다. 마지막 순간에 내린 결론이 그것입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웠다. 누가 주신 싸움이냐? 주께서 주신 싸움이죠. 내가 달려갈 길을 마쳤다. 누가 달려가라고 했느냐? 주께서 달려가라고 했죠. 내가 믿음을 지켰다. 누구에 대한 믿음을 지킨 것인가? 주님에 대한 의리를 나는 지켰다, 그것입니다. 돌아보며 내린 결론입니다. 그러면서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하는 말이 너도 이 같이 살아라. 그러면 너도 그 순간이 올 때 이렇게 된단다 라고 말하는 셈입니다.
그렇게 돌아보던 바울이 갑자기 이 죽음의 문을 통과하면 어떻게 되는가? 자기 갈 길을 내다보고 있습니다.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개선장군 같지 않아요?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온 장군이 왕 앞에서 ‘이기고 왔습니다. 이제 내 몫을 주십시오’ 하고 요구하는 개선장군의 모습입니다. 현실적으로는 죽음이 눈앞에 있습니다. 돌아보고 내다보던 사람이 문득 자기 주위를 둘러보고 있습니다.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아직도 내 뒤에 남아서 여전히 살아서 이 길을 가야 하는 너희 모든 자가 이와 같다, 그러니까 직무를 다하라,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사도가 그동안 살아오면서 겪었던 이런저런 개인적인 일들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다 버리고 나를 떠나서 나에게 남은 자가 아무도 없던 적이 있었고, 혼자 버려진 적도 있었다는 여러 이야기를 합니다. 누구는 어떻고 누구는 어떻고 누구는 네가 조심해야 한다고도 말합니다. 나도 그에게 상처를 받았다는 이야기까지 하면서 자기가 경험했던 지나온 날들을 말합니다. 회상하며 하는 이야기의 절정으로 내놓는 말이 있습니다. 17절입니다.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에게 힘을 주심은 나로 말미암아 선포된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모든 이방인이 듣게 하려 하심이니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짐을 받았느니라.” 중간에 있는 말을 빼고 앞에 있는 말과 뒤에 있는 말, 주부와 술부만 연결하면 이렇게 됩니다. “주께서 나를 사자의 입에서 건지셨느니라.”
아까 처음에 말했지요? 하나님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가 책임질 길이다. 그가 보장하는 길이다. 그런 자기 경험을 지금 말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사자의 입에서 건져냄을 받았을까요? 일단 사자 입에 들어갔으니까 건져지지요. 사자 입에 안 들어갔는데 어떻게 사자 입에서 건져내져요? 어떻게 요단에서 갈라지는 것을 경험했을까요? 요단에 들어갔으니까요. 아예 요단에 들어가지 않은 사람을 놓고 어떻게 요단을 갈라요?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를 사자의 입에서 건져냈다! 사자의 이빨 사이로 내가 들어갔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결론이 어떻게 납니까? 주께서 나를 거기서 건져내셨다!
여러분,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자기의 마지막 순간에 했던 말을 이 학기를 마치는 마지막 날, 3학년은 학교를 공식적으로 떠나는 마지막 날에 나도 사도의 심정을 담아 그대로 다시 여러분에게 전달합니다. 말씀을 전파하십시오. 전도자의 일을 하십시오. 하나님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주시는 그 직무를 다하십시오. 사자의 입에 들어가는 것을 두려워 마십시오. 그 고난은 명예요, 영광이요, 아름다운 것이요, 죽어서 사는 고난인 줄 아십시오. 사람을 살리고, 사람을 세우고, 사람을 하나님께 합당하게 행하게 하는 여러분에게 주어진 영광스러운 직무에 모든 것을 걸고 충성하는 사역자로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정창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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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 주일을 향하는 7주간 시리즈 설교(제2주-1)

성경에서 말하는 증인은 ‘본 사람’이 아닙니다. 구경한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이끌어 가시는 구속의 큰 역사, 예수님이 친히 시작하시고 이어가시는 예수의 역사에 참여한 사람, 동참한 사람이어야 증인입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를 멋드러지게 하고, 예수님에 대한 책을 쓰고, 예수님에 관한 영화를 멋있게 만들었어도 그 사람 자신이 예수 믿는 사람이 아니면 예수님의 증인이 될 수 없습니다. 증인은 예수님의 역사에 자기 자신이 참여한 사람입니다.

성령강림 주일을 향하는 7주간 시리즈 설교(제2주)

성령이 오시면 주신다는 그 능력은 구체적으로 무슨 능력인가? 본문만 가지고는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말씀을 안 하셨기 때문입니다. 능력을 받아서 증인이 된다고만 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능력에 대한 자기 자신의 생각을 가지고 이 능력을 말하곤 합니다. 그리고 성령이 그 능력을 주실 것이라고 믿고, 그 능력을 사모합니다.

부활절 이후 7주간 성령설교(제1주)

그런데 주님은 이들에게 아주 중요한 약속을 확실하게 하십니다.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너희에게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보내주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성령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명령을 하십니다.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면 너희는 땅 끝까지 가서 나의 증인이 되라.” 이렇게 말씀하신 후에 예수님은 제자들을 땅에 남겨놓으시고 그냥 가셨습니다. 고아처럼 버려 두지 않으시겠다고 하던 주님이 고아처럼 버려두고 가셨습니다. 기약도 없이 때도 없이 주님이 떠나가셨습니다.

부활절 설교- 사망을 이기고 부르는 노래

하나님이신 우리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역사가 거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죽으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구주께서 다시 살아 나셨습니다. 부활하신 것입니다. 죽음이 역사적 현실이고 구체적 사건이고 개별적 경험이듯이, 부활도 구체적 사건이요 역사적 현실이요 개별적 경험입니다. 죽음의 시체가 거기 있었듯이, 부활한 몸체가 거기에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부활을 말씀하면서 그것은 당연히 죽음 몸이 다시 살아나는 것으로 전제하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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